시민사회
우리는 누구인가? 에 대한 대답으로 인종을 문화를 사회를 얘기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시민, 조선 반도 안에서 유래 없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는 시민이다. 헌데 이 시민은 서양에서 탄생했다. 조선은 합리주의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근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국사에서는 조선 말기 사회 제도의 문란과 실학등을 내세워 근대를 설명하지만, 실상은 독립조차 스스로 힘으로 하지 못한 가련한 나라이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그의 책에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풀이했다.
경제적으로 전쟁이후 최고로 잘 살면서도 사회의 분위기는 꿈을 좇는 대신 돈을 얘기하고 허영을 부추기는 광고가 거리에 즐비하다. 나는 이 문제가 극도로 층이 얇은 시민사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현재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시민사회이다. 헌법에 나와있듯이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헌데 우리는 독립도 스스로 하지 못하고 과학의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과학에서 중요한건 기술이 아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다. 사실을 관찰하고 그로부터 일반적인 모델을 도출하는 귀납적인 사고와 대전제로부터 소전제의 참, 거짓을 논하는 연역적인 사고. 교육은 점수가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알려주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해야하는데 우리의 교육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우던 대학에서는 활발한 학문적인 토론이 일어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토론하는 능력이 길러지고 나의 의견을 주장하는 방법 상대의 의견을 수용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지금의 대학은 취업학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대간의 갈등또한 장난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을 소유물처럼 여기고 자식은 부모를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에 대한 존중없이 자기가 살아온 지극히 일부의 경험을 가지고 남을 재단하듯 판단해버린다. 귀를 막고 소리치는 격이다.
언론이 제정상이라면 모르겠지만 권력감시의 첨병이라 할수있는 언론은 파란집 눈치를 보기에 바쁘고, 쓴소리를 하는 언론에는 주홍글씨를 박아버린다. 월급쟁이들은 수십년을 벌어야 겨우 장만할 코딱지만큼의 아파트를 위해 하루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소비하고, 이미 집을 가진 사람들은 집값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가계부채를 보면 가정에서 지고 있는 빚중 가장 비중이 큰것이 집이다. 집은 땅과 하늘 사이에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시장논리에 따라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는 경제적인 개념이 되어버렸다.
천년을 살아온 나무도 뿌리가 한번 들리면 죽음을 면치 못하는데 한낱 인간이야말로 어떻겠는가. 실줄기가 모여 굵은 뿌리가 되듯 개개인의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마을이 모여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여 국가가 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집이 지갑속에 들어있으니 이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봤자 공인중개사들의 모임과 다를게 무엇인가.
작아보이는 것이라도 그 뿌리가 튼튼히 박혀있으면 사계절을 견딜테지만, 거목이라 할지라도 뿌리가 썩어있으면 한낱 뗄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를 얘기하는건 웃긴일이다. 나무가 꽃을 틔우는 이유는 내년에 뿌릴 씨앗을 위해서다. 죽은 나무는 꽃을 피우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장작에 인조꽃을 달아 놓은 것이 아니고, 한겨울을 뚫고 그 검은 가지 끝에 움트는 꽃눈에 있다.
이런 상황들을 인식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다. 우리는 멍청한 대중이지만 역사적으로 옳은 선택을 한 것은 이 멍청한 대중이다. 똥을 싸는 것도 우리지만 치우는 것도 우리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먹고 자랐으니, 이곳에서 해야할일을 한다. 그것이 마땅하다. 내가 시민이니까.
여기까지는 왜고 다음은 어떻게에 관한 생각을 해봐야겠다. 어떻게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