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언어2

김나무_ 2015. 12. 30. 16:45

언어에 대해 또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골치 아프다고 생각해는데, 생각할게 많다는 것은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양한 재미가 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인데, 차이라면 나는 귀납하여 코끼리를 만들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과 예술이 갈리는 것 같다.

이번에는 정보의 교환, 이라는 측면에서 언어의 사용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언어 활동은 나와 타인 사이에 이루어진다. 나와 다수의 사람 사이에도 이루어지고 내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나와 타인은 어떤 방식으로 언어를 교환하나? 물에 기름을 부었을 때 처음에는 기름방울이 섞이는 것 처럼 보이다가 서로 꿈틀대며 나뉘고 마침내는 뚜렷한 경계로 안정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걸 말로 표현하면, 자기동일성의 확인과정? 이라고 쓸 수 있다. 속성이 같다면, 뜨거운 물에 차가운 물을 부으면 둘은 섞인다. 온기를 교환한다. 그리고 평균적인 온도로 안정된다.

나와 타인이 언어를 주고 받을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나의 언어체계가 상대방의 언어체계와 얼마나 비슷한지 서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눈치 싸움. 언어체계는 공교육을 통해 공유하는 부분과 가족을 통해 내려와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공교육이 책을 통한 문자기반의 언어체계라면 가족은 구전하는 소리기반의 언어체계다. 이 두개가 한 사람의 언어체계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문자기반의 언어체계를 가진 사람과 소리기반의 언어체계를 가진 사람이 언어를 주고 받으면 그건 물과 기름을 섞을 때처럼 서로의 차이만 뚜렷하게 부각된다. 아마 언어를 주고 받기도 전에 이미 앞선 탐색의 과정에서 저 사람은 나와 다르다고 둘 모두가 느낄 것이다. 물에 기름을 붓는 상황은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비슷한 언어체계를 가진 사람이 대화하는 경우. 내가 궁금한 건 어떤 경우에 화학작용이 일어나냐는 거다. 공기에 닿으면 불이 붙는 화학물질처럼 어떤 경우에 안정에서 벗어나 스파크가 튀는지 그게 궁금하다. 학교와 같은 보통의 공교육에서는 그 과정을 찾기가 힘들다. 왜냐면 그때 정보의 교환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 양쪽 모두에게 손실만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뜨거운물을 차가운 물에 부었을때 차가운물은 온도가 올라가고 뜨거운 물은 온도가 내려가서 둘은 중간의 평형을 이룬다. 여기서 뜨거운 물이 더 뜨겁게 되거나 차가운 물이 더 차갑게 되는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화학작용이란 같다고 생각한 오해에서 출발하는 건가?  모방, 으로는 부족하다. 이를테면 차가운 물이 뜨거운 물을 모방한다고 했을때 그 뜨거운 온도까지는 다다를 수 있지만 그걸 넘어서려면 다른게 필요하다. 이건 어떤 의심? 

아까의 생각으로 돌아가서. 언어는 정보를 전달한다. 양쪽으로. 그리고 그게 가능한 것은, 내가 알고있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 믿음은 언어를 교환하기 시작할때, 서로의 언어체계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한계에 기초한다. 한계, 라는 것은 편견, 고정관념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언어의 교환은 아이들이 장난감 칼로 칼싸움 흉내를 내는 것과 같다. 서로가 상대의 언어체계의 한계에 대해 스스로 설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대화를 한다. 그 한계를 정하는 것은, 내가 상대방의 언어체계에 대해서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런 언어의 교환은 정신의 고양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면 내 스스로가 상대방에게 장난감 칼을 쥐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의 사용은 나와 상대의 언어체계를 시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정보를 전달한다고 봤을 때 '새로운 정보'라는 것은 분류 안에 특수한 것을 추가하는 걸 말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 기존의 분류가 잘못되었다고 얘기해야한다. 정보는 단순히 분류안에 개별적인 새로운 사실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비극을 잉태한 씨앗으로 삼키면 배탈, 구토를 일으켜야한다. 고통 속에서 기존의 분류, 체계를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타인과의 정보의 교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상대가 탄 독을 삼켜 앓음으로 내부로 돌아온다. 독은 기존의 체계, 분류를 흔든다. 만약에 독에 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통보다는 새로운 자극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한바탕 홍역으로 심하게 앓는다. 

그러면 나는 여기서 도덕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분류체계를 시험해야하는 당위는 어디에 있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한 인격이 주체적으로 자라나려면 처음에는 기존의 체계를 일방적으로 흉내내어 습득한다. 하지만 그 체계-옷은 그에게는 맞지 않는다. 언어는 그 특성이 '분류'인데 분류는 개별적인 사실들을 통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어떤 개별적인 것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다. 밥, 이라는 분류로는 결코 밥을 지을 수 없다. 흉내낸 분류들이 '나'라는 큰 분류로 통합되는데 그건 흉내내고 모방하는 나다. 스스로 분류한다고 착각하는 나다. 그 흉내낸 분류가 아무리 고급스럽고 멋지다 해도 그걸로는 나를 표현할 수가 없다. 내가 흉내내고 모방한 체계로 나를 표현하기는 커녕 기존 체계의 영업사원으로 월급도 받지 않고 열심히 대리해 일을 해줄 뿐이다.  

살아있는 인격은 부모의 얼굴을 빼닮았지만 고유한 특성이 있다. 아니, 아직 고유한 특성은 발현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에게 맞지 않는 큰 옷 아래에 가려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느 시점에 기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새로이 옷을 지어 입던가 최소한 자기가 입는 옷을 몸에 맞게 고쳐 입는다. 재밌는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생긴 모방의 문제는 결국 독이 든 언어를 먹는 걸로 해결할 수 있다는 거다. 문제 자체에 답이 들어있는 것처럼, 언어는 불완전하나 불완전함을 변형하여 새로운 불완전함으로 바꾸는 방식 또한 가지고 있다. 이 방식이란건 결국 개별적인 것들을 통합해 분류하는 언어의 추상성과 다름 아니다. 언어는 사물을 분류하는 특성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데 그 문제는 결국 언어 자체로 풀어야 한다. 언어는 이렇게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방식을 통해서 스스로의 몸집을 불려왔기 때문에 언어가 소멸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정말로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