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구려물감
요 몇년 동안은 그림을 그릴때 색을 엄격히 제한하고 제한한 색들조차 싸구려 물감을 썼다.
몇가지 얻은 점.
채도로 승부를 볼 수 없으니 다른 것에 신경쓰게 된다.
명도에 대한 고민은 계속 진행중인데 덕분에 색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좋은 물감은 그 자체로 너무 강력해서 쉽게 색뽕에 취한다.
평소에 볼 수 없는 채도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려놓고 내가 어떻게 그렸는지 모르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게 나쁜 방식은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가지고야 일정 수준을 넘을 수가 없다.
좋은 그림 이상으로 갈 수가 없다.
예술은 도취에서 시작하지만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명료해야한다. 술에서 깨야한다.
중간쯤해서 뒤돌아보면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색을 섞는 것에 굉장히 공을 들이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주황색을 칠한다면 튜브에서 짜서 그냥 바르는 식이었는데
지금은 원하는 색을 만들기 위해 계속 섞는다.
색을 섞는 것은 단순히 물감을 섞는게 아니고 느낌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아마 이부분, 이 노동이 필요한 부분이 문학을 하는 것과의 차이가 아닐까.
그림에 필요한 노동이라야 고상한 정도지만 그래도 글쓰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형식을 만드는 것에 노동이 필요하고,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하다. 보이는 건 형식이 전부니까.
어떤 분위기, 심상을 떠올릴때 그에 해당하는 명도, 채도, 색상 그리고 속성들 사이의 차이가 있다.
어느정도까지 섞을것인가. 어디서 섞을 것인가. 계속 시도중이다.
그림을 그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차피 옷이 몇벌 없으니 뭘 입을까 고민하는 시간이 적어진거다.
대신에 같은걸 반복하는건 내 성격에 안맞아서 매번 변화를 추구하는데 그래봐야 몇 안되는 색, 채도에서의 변화다.
덕분에 큰 구조와 그 안에서의 미묘한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단점
다 그리고나서 그림 찢어버리고 싶다.
만약에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은 물감으로 시작해야한다.
그래야 색뽕에 취해서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취한거 깬 다음에는 후회할 수도 있지만,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