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4

리얼리즘에 관한 소고

김나무_ 2012. 6. 10. 18:29

리얼리즘에 관한 소고


 리얼리즘의 역사적 배경? 혹은 내가 사용하는 단어, 리얼리즘에 대하여.

동기 - 그림을 그리는데 재미가 없었다. 리얼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리얼리즘이란 단어 혹은 그 느낌에 생각이 미쳤다. 이는 삶과도 연관이 되는데, 현재 대학교 4학년에 다니는데 열정이 부족하다. 결국 이는 내 삶의 문제인가. 


어쨌든 리얼리즘에 대해 생각해보자. 동기조차 의심스럽고 불순한, 리얼리즘에 대하여.


 리얼리즘 하면 떠오르는 것은 자연주의 시대의 그림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신화적인 이미지를 부정하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하자는 것. 혹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리얼리즘. 있는 그대로를 모사한 그림.

 있는 그대로, 라는 말. 구상적인 회화를 생각해보자. 어떤 소재를 선택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그린다. 그러나 여기서 있는 그대로, 란 말은 철저하지 않다. 구멍이 숭숭 나고 경계가 흐릿하다. 왜 그 소재를 선택했나, 왜 그 소재를 재현하는가의 문제가 남아있다. 또한 그 소재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의 문제도 있다. 소를 그린다면, 소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코 혹은 혀 혹은 뿔에서부터 그림은 시작 할 수 있다. 전체를 고려 하지 않고 단순히 소를 재현 할 수 있다.

 회화에서 리얼리즘은 사실적인 묘사로, 평면에 입체를 재현할 때 얼마나 생생한 가로 사용된다.

 그러나 리얼리즘이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은 좀 더 넓다. 리얼리즘이란 단어는 시대를 떠나서 성립할 수 가 없다. 나는 현시대를 2012년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고 한국인이고 홍익대학교 학생이며 남자 24세 이다. 내 개인의 역사, 학습한 역사, 내가 속한 집단의 역사를 때어 놓고 리얼리즘을 말하긴 어렵다. 만약 아무것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에게 리얼리즘은 하얀 백지일 테니. 

 개개인에게 리얼리즘은 자취방 화장실 벽에 묻은 얼룩일 수도 있고, 여행지에서 맛본 말젖의 비린내일 수 도 있다. 이 지극히 개별적인 리얼리즘은 예술을 통해 보편화 되는 순간 그 정당성을 의심해봐야 한다.

 과연 나에게 리얼한 것이 너에게도 리얼한가.

 리얼이라는 단어 접어두고, 진짜와 가짜를 써보자. 진짜와 가짜가 판치는 곳이 미술시장이다. 위작과 진품. 좀 더 넓게 보면 정치판. 갖은 이념들과 논리로 자신들(정당)의 정체성을 확립하려하고 정당화 한다. 진짜는 가짜 없이 성립할 수가 없다. '진짜'에 가치를 부여해주는 시스템이 없다면 '가짜'가 '가짜' 일 이유 또한 사라진다. 이 가치를 판단하는 시스템은 무엇인가. 미술 평론가 집단 혹은 미술을 향유하는 계층의 시선 혹은 투기꾼들의 시선.

  작업함에 있어서 리얼리즘은 

개인의 특별성을 시대에 걸맞는 역사적 보편성으로 어떻게 치환하느냐, 의 문제이다.

개인이 학습하는 것은 결국 모두 과거의, 이전의 것이다. 여기서 작가는 어떤 것은 수용하고 어떤것은 배척한다. 즉 선택한다. 그리고 자기의 삶의 경험에 견주어 본다. 과거에는 없는 그러나 자기에게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과거에는 없는 것이란 건 무엇인가) 여기서 과거의 학습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과연 아무것에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가? 작업자에게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회적인 망 안에서 그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작업자는 과거의 사례를 이용하거나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관철한다. 

조금 풀어서 얘기해보자. 작업자에게 창작의 동기는 아름다움의 발견일 수도 있고, 창작에서 오는 기쁨과 재미일 수도 있고 여러가지가 있을 수있다. 돈을 버는 수단이라거나 명예욕일 수도 있다. 작가는 과거의 사례를 통해서 자신의 작업 동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만족시킨다. 아름다운 미술작품을 보는 행위를 통해. 그러나 이는 과거의 것이다. 시간은 개인마다 다르게 흐르기 때문에 가장 최신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걸 보는 감상자와는 시차가 생길 수 밖에없다. 어느 작가의 작품이란 것은 그 작가의 시간적인 선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2012년 6월 10일에 발표된 작품이라 할지라도 그 시작점은 아득히 먼 옛날일 수 있는 것이다. 즉 작품을 보는 관람자는 이 시차에서 어떤 불쾌함 혹은 고지식함 혹은 폭력적인 징후를 발견한다. 주눅이 들 수도 있고 낡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다. 어느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한발짝 뒤에 물러나서 본다면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는 것처럼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그 작가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관객과는 시차가 있기 대문에 관객은 거기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즉 작가는 이런 시차를 "낡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에 대한 맹목적인 부정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경험한 시차를 통한 것이다. 만약 한물 간것이라고 여겨지는 사조 사상 작품 일지라도 작가에게는 지극히 현대적이며 아니 너무나 먼 미래의 얘기 일 수 있다. 

리얼리즘을 말할 때에는 결국 개개인의 시간선이 다르게 흐르고 있는 걸 염두에 두고, 결국 과거의 것일 수 밖에 없는 현재의 작품들과 이를 대할때 발생하는 불편함-시차-를 통해서 설명해야 한다. 리얼리즘은 어떤 고정되어있는 사상이나 사조가 아니라 개인이 이러한 시차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