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부터 이틀정도 밤을 새고 어제 새벽에 비행기를 타서 나는 지금 제주도에 있다. 오후에 자연사박물관을 들러 나오는데 비가 그쳐있었다. 멀리 푸른 하늘 가운데에 산이 솟아 있었다. 산머리에는 눈이 갈라져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 맑아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때 문득 꿈을 꾸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꿈은 돌이켜보면 지루함과 비현실적인 장면들의 연속이다. 관광도 마찬가지여서 십분전에 나는 삼미터짜리 박제된 산갈치를 보고 십분뒤에는 식물원을 가로지르는 용암동굴을 걷고 있다. 꿈과 다른점은 내가 있는 장소를 설명해주는 표지판이 군데군데 있는 것인데 이해할수 없는 언어들로 적힌건 별반 다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해를 하더라도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회색하늘 비가 드문드문 내리는 속에서도 바다는 산호색으로 부서진다. 제주는 거무튀튀한 돌색과 대비를 이루는 산뜻한 산호의 색으로 느껴진다. 뒤러가 떠오르는 엄격한 중앙의 구도와 굴뚝이 없는 낮은 돌담집, 많은 관광차와 여러번 재활용된 회수권, 중국인들도 있다. 그 속을 나는 나를 낳은 사람과 그 사람을 낳은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낳은 또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걷고 있었다. 도처에 귤이 매달려 있었다. 야자는 오랜 건물 사이에 솟아 검게 시들고 있었다. 한번도 된서리를 맞은 적 없는 이 땅의 무수한 구멍들 속에 이국의 타조와 흰공작, 가시달린 식물이 고여 있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삼촌인데, 미국에서 막 돌아온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막내 삼촌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와는 대비된 삶을 살고 있다. 피부는 더이상 보드랍지 않고 거뭇한 수염이 매일 나고 관절은 어제까지 움직인 만큼 움직일 수 있고 의미없는 소리를 내는 것을 두려워 하고 이빨이 많다. 아이는 어떤 면에서는 함수같은 존재여서 대부분의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고 그 역도 가능하다. 물론 그에게는 그만의 사소한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야 세계는 너의 사소한 차이를 받아줄만큼 자비롭지 않단다. 나는 아이를 웃겨 주었다. 나는 자비로운 삼촌이니까.
물론 나의 자비로움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적어도 제주의 교통계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무단횡단을 대범히도 경찰차 앞에서 한 까닭에 딱지를 끊겼다. 신원조회기에 주민번호를 치니 엉뚱한 주소가 나왔다. 생각해보니 현재 주소는 고모네로 옮겨져 있다. 문득 딱지가 날라가면 벌금을 내줄까 안내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네는 잘사는편이니까 기꺼이 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엄마한테 전화를 하겠지. 음력으로 치면 어제가 생일이었는데 생일이라 한턱 쏜 셈 치면 아깝지는 않기는 개뿔. 무단횡단이라니. 적어도 서산에서는 그런일이 없었다. 서울에서도. 그니까 세상을 자비롭게 본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경찰차 앞에서 차도를 가로질러도 봐줄만큼 세상은 자비롭지 않단다. 근데 도로에 금은 누가 그어놓은거야 도대체? 박정희? 빨갱이?
아버지쪽 형제는 칠남매인데 맏이인 아버지를 필두로 남자가 다섯 여자가 둘이다. 어제 저녁 먹으러 들른 횟집에서 나는 셋째 삼촌에게 수줍은 고백을 들었는데, 사실은 셋째 삼촌이 일진이었다는 것이다. 요즘말로 하면 일진이었다고 한다. 그니까 그 말이 어떻게 나왔냐면 할머니가 삼촌들이 술마시는걸 못마땅하게 보고, 맏이의 건배 제의를 '시부럴놈의 것좀 그만 쳐먹지' 로 받아친데에 있다. 나는 아니 할머니가 마시지 말라는데 왜 마셔요 라고 셋째 삼촌에게 물었고, 셋째 삼촌은 할머니 하란대로 했으면 자기가 대통령 하고 있지 지금 이렇게 있겠냐고 술을 마셨다. 할머니는 자기가 술에는 한에 맺힌 사람이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십세에 죽은,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시고 저수지에서 실족했다. 그리고 칠남매를 기른 것이다. 근데 할머니는 오남매의 외동딸이었다. 위로는 모두 남자 형제들. 그니까 할머니는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헌데 서방은 술마시고 죽었지 아들은 일진이지 속이 많이 썩었을 것이다. 오남매와 칠남매의 대비되는 삶.
삼촌은 나에게 남자는 고집이 있어야한다고 했다. 셋째 삼촌은 동네형계의 끝판왕 같은 느낌이어서 사람들을 좋아하고 술을 좋아한다. 술과 같이 먹는 날것들도 좋아한다. 나는 또 그와는 반대의 사람이어서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술은 조금마시는 걸 좋아하고 날것보다는 익힌 것을 좋아한다. 시간이 감에 따라 우리는 반대되는 삶을 살지만(아기와 성인처럼) 그 속에서도 또한 반대되는 삶을 살아간다. 가지를 치는 것처럼 나뉜다. 새로난 가지들은 저 편의 가지를 보며 '다름'을 느낀다. 내 몸에 진딧물들아 저쪽으로 가라. 햇빛은 내쪽으로 더 많이 와라. 근데 굽이굽이 접어들어가면 결국에는 한 몸뚱아리에 붙어 있는 것이다.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뿌리와 가지는 대칭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대칭에도 종과 속이 있으니 뿌리가 어미다. 아기가 저 혼자 살지 못하듯이 가지도 저 혼자 살수 없다. 짝을 이루는 뿌리를 자르면 가지도 죽어버린다고 한다. 서로 다른 공간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뿌리를 파들어가면 한군데에 붙어 있고 또 그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들과 짝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옛것을 배우는 것은 그 짝을 이루는 뿌리를 앎에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빵나무는 오렌지색 껍질을 가지고 있다. 사랑의 리퀘스트에 나오는 셋달린 빨간열매는 먼나무의 열매다. 나는 몇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배웠다. 갈치회, 오메기떡을 맛보았고 돼지고기를 돔배고기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았다. 관광지를 도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고 별 감흥은 없지만 낯선 공간에 나를 던져두는 것도 때로는 괜찮다. 자주하면 멀미가 나겠지만 가끔은 괜찮다. 돌아가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