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2-14

소통하지 않는 자유로움

-스마트폰,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소위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89년생이고 얼마 전에 생일이 지나 스물세살이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주로 우물 안에 살고 있었다. 우물은 '우물' 이라고 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물이 고여있지 않았다. 도로가의 정류장처럼 어떤 수맥의 변두리 위에 있던 우물은 바닥에서는 물이 솟아나오지만 그 양은 지극히 적었고 내 입을 적시기에도 약간 모자랐다. 청록색으로 반짝이는 돌들과 진흙이라고 해야할지 사발처럼 움푹 패여있는 젖은 땅에서 기포가 올라오는 것을 보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얼굴을 숙이고 지면에 입을 맞추며 물을 마셨는데 물에서는 흙냄새와 신선한 풀향기가 났다. 아마 물은 멀지 않은 숲 혹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비록 내가 볼 수 있는 것은 높이 뚫려있는 구멍으로 비치는 시간의 변화가 전부였으나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상상할 수 있었고 즐거웠다. 나는 한 자리에 고정되어있었지만 세상은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세계는 나에게 다가왔다.
 가끔 외롭기도 했다. 바람이 불면 보이지 않는 공기의 흐름이 우물안을 깊게 돌아 나갔다. 어떤 것은 음이 되고 어떤 것은 따듯한 밥냄새처럼 나에게 포근함과 위안을 주었다. 나는 젖지 않은 돌-그것은 물이 솟아나는 구멍보다 60cm정도 솟아난 평평한 바위였다- 위에서 쭈그리고 앉아 글자를 더듬었다. 어떤 것은 내가 쓴 것이었고 어떤 것은 남이 쓴 것이었다. 나는 주로 밤에 글을 읽고 썼는데 그것은 밤이 주는 차분함 때문이었다. 밤은 어째서인지 어둡지 않았다. 차분히 덮힌 베일처럼 사물들에 한꺼풀의 피막을 씌워 안에 있는 것들을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꿈에서-나는 종종 우물 밖에 서있는 꿈을 꾸곤했다-본 밤의 지평선에는 언제나 보라색으로 분홍색으로 빛나는 도시들과 건물들이있어 밤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밤이 되면 잠들기 직전까지 글을 쓰고 글을 읽고 어떤때는 저명한 논리학자가 되어 나의 말을 비판하고, 어떤 때는 궤변론자가 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하는 문맹아처럼 단어들을 늘어 놓았다. 
 바위 옆에는 돌을 빼어 만든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공책과 펜을 두었다. 펜은 잡기가 편하게 두툼했고 4색이었으나 내가 쓰는 것은 검정색 하나 뿐이었다. 공책은 끝까지 쓰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완성이 가지는 답답함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게 낙서든 일기든 소설이든 설사 뒤죽박죽 뒤엉킨 단어의 배열이든 공책이 끝나갈 때면 내용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흰 종이에 아무렇게나 점을 찍으면 사람의 지각능력은 점들을 선, 면, 명암, 혹은 기억 속의 어떤 사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처럼. 공책의 막바지에 다다르면 나는 내가 적어온 것들이 넘어간 페이지 뒤에서 낮고 작게 호흡하는 것을 들었고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 압박을 받아서 결국은 새로운 공책을 꺼내게 되었다.
 흰 종이가 주는 새로움이란! 네 귀퉁이에 여백을 두고 일정한 간격을 두어 희미한 직선들이 수평으로 배열되어 있다. 종이와 종이 사이에는 스프링이 있고 스프링은 둥근 구멍을 통과해 나선으로 위아래의 구멍으로 들어간다. 구멍과 구멍을 잇기도 하고 여백에 낙서를 하는 것은 재미가 있다. 이따금 밤하늘에 구름이 자욱하면 종이의 흰색은 더욱 빛났다.-그것은 구름이 하얗기 때문인가?- 글씨를 흘려쓰기도 하고 또박또박 쓰기도 하고, 무협소설의 서두를 복수심에 가득찬 비통한 주인공의 심정으로 적기도 하고 환상의 세계의 초입을 적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샌가 잠에 들었다.
 밤공기는 무척 차가와서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이불안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었다. 답답하고 숨이 막혔지만 따듯했다. 나는 그 때 바깥의 세상은 차갑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경험했는데 나는 자유로움을 희생하고 이불 안으로 도망쳤다. 밤사이 솟아난 물로 얼굴을 씻고 나는 학교를 갔다.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우물 밖으로 연결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야했다. 사다리는 순전히 편의상 붙인 말로 잡기 쉬운 돌들을 잡고 올라간 것이다. 내가 올라가는데 사용한 돌은 총 67개인데 매번 올라가는 길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빠르고 쉽게 올라갈 수가 있었다.
 아침공기는 차고 허연 하늘에는 초승달이 희미하게 떠 있었다. 학교의 수업시간에는 책을 읽었다. 가끔 무서운 선생님이 들어오면 공부를 하는 척 하기도 했다. 나는 창 밖을 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얘기를 하기도 했다. 쉬는 시간이면 별관처럼 학교 밖에 위치한 작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나는 책을 많이 봤는데 재밌기도 했고 일종의 공부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드럼연습을 했다. 막대기를 박자에 맞춰 고무판에 쳤다. 가끔 박자가 정확히 맞으면 박자기의 소리가 막대기의 소리와 겹쳐져 들리지 않았다. 그럴 때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시계가 없었고 시간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모든 사건들은 규칙적이고 순서에 맞게 배열되어있었고 어떤 것이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어떤 것이 시작됐다. 나의 몸은 그 순서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 집중하지 않아도 순서에 따라 흘러가게 되었다.
 나는 친구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지금 떠올려보면 그 친구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목소리를 하고 있었는지 생생히 기억 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조각 하나 하나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는 있지만 합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후 느즈막한 시간에 나는 우물로 돌아왔고 그 작은 공간에서 막 떠오른 금성을 보았다. 금성은 초저녁에 떠오르는데 우물가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별이다. 금성을 필두로 별들이 하나 둘 떠올라 우물을 가로 질러 갔다.
 글쓰기가 내키지 않을 때는 노래를 불렀다. 가사를 신경쓴 적은 없었다. 그저 부르는 행위가 좋았다. 우물을 울리는 소리의 파장이 좋았다. 녹음해보고 다시 들으며 듣는 게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노래를 불렀다. 날이 밝을 때까지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 차가운 밤공기에 손발이 얼얼했고 물은 바닥을 드러냈다. 밤이면 둥지로 돌아가는 작은 새처럼 우물 귀퉁이의 바위 위에서 잠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 사람의 손길이 끊긴 우물 안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감각보다는 기억에 의존해서 자기가 머릿속으로 판단을 내린 것에 대해서는 쉽게 의심을 하지 않는다. 우물은 낡고 부서졌다. 사람들의 무관심과 판결 속에서 나와 우물은 보호 되었다.

 나는 지금의 얘기를 쓸 수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과거의 일들 뿐이다. 지금 내가 처해있는 상황은 가끔은 재밌기도 하고 가끔은 열정적이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건조하다. 나는 우물 밖으로 꺼내어져서는 내동댕이쳐지고 저기 사람들의 무리로 들어가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시시 때때로 받는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내가 서있는 땅에 새로이 우물을 파지만 나의 손은 너무 작아서 흙을 파기에는 적당하지 않다는 것만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웃으며 나를 반기고 나에게 따스한 말을 건내고  그 웃는 얼굴로 내 몸뚱아리를 분해해 긴 막대에 걸어 놓는다. 그러면 우리들은 모두 긴 장대에 얼굴과 팔, 다리, 몸뚱이가 분리되어 걸린채로 바람에 따라 보는 방향을 달리하며 앞에 있는 또다른 몸뚱이와 대화를 하는데 눈은 눈을 보지 않고 대화는 서걱거리고 긴 장대와 긴 장대 사이에는 바람이 지나간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기 위해 담배를 꺼내 상대방의 입에 물리고 담배불을 붙여주는데 짧은 연기 한 소절이 지나가는 그 침묵의 순간만이 나에게는 더 없는 위안의 시간이 된다. 이 따금 남보다 높이 솟은 장대가 만천하에 분해된 몸뚱이의 위용을 흔들어댈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우러러보기도 하고 얼른 달려가 장대를 부셔버리고서는 땅에 떨어진 몸뚱이들을 바라보며 웃어댄다. 입은 끊임 없이 웃는데 눈은 웃지 않는다. 

눈은 웃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