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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4

5. 건물의 2층에 방이 있었다.

 검정색의 굉장히 크고 무거운 철문에서는 광택이 났고 많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자물쇠들은 모양이 제각각이었고 이국적인 문양이 들어있는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구리로 되어 붉은 빛이 돌았고 어떤 것은 노랜색의 스티커가 붙어있다가 떨어진 흔적이 있었다.
 문으로 향하는 층계는 좁고 어둡고 천장의 희미한 푸른 등이 계단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낡은 자전거 한 대가 난간에 매달려 있고 -손잡이 부분이 아래를 향하여- 금새라도 떨어져 올라오는 이들을 덮칠 것 같았다.
 쿄코는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양갈래로 땋은 주황색에 가까운 쿄코의 머리카락이 허리부터 흔들리고 모직으로 된 체크 무늬의 코트와 어울리지 않았다. 아이가 어른의 옷장을 뒤진 것 같은 차림이었다.
 쿄코는 열쇠 꾸러미를 들고 있었는데 열쇠들은 하나같이 크고 낡았다. 쿄코는 열쇠를 아래쪽에서부터 꽂았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가장 높은 곳을 열고 쿄코는 까치발을 들어 열쇠를 뺀 다음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의 기억들. 쿄코는 그 안에서 여러차례 강간을 당했는데 흔적들은 냄새로 남아있다. 곳곳에. 쇼파와 카펫과 바닥과 책상 위에.
 그러나 그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쿄코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빈 유리잔에 따라 전자렌지에 넣어 데웠다. 종소리가 나고 렌지의 우유를 꺼냈을때 김이 모락모락 났다. 쿄코는 쇼파에 기대듯 누워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만끽했다. 쿄코의 마른 몸은 커다란 쇼파에 어울리지 않아 쿄코를 대신한 빈 공간들이 쿄코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 아래로 쿄코의 배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쿄코는 너무 지루했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기로 생각했다. 그날 회색의 더러운 청바지를 입은 세명의 남자는 차례차례 쿄코를 범하고 그녀의 가슴에 침을 뱉고 더러운 휴지마냥 그녀를 내팽겨치고 유유히 떠났다. 그들은 힘이 셌고 쿄코는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쿄코는 천장의 귀퉁이를 보고 창문 너머 둥글고 거대한 검은 지붕을 보고 딱딱하고 갈라진 책상의 모서리를 보았다. 쿄코의 몸은 달아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했다.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 위로는 고양이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담장은 건물을 부술듯 밀려오고 있었고 그 바람에 건물의 외벽에 금이 갔다. 금이 간곳에서는 초록과 빨강의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었다. 쿄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것들을 모두 지켜봤는데 그 때 당시 그녀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쿄코는 갈색머리가 되었고 크고 육중한 검은 철문에는 자물쇠들이 여러개 달렸다. 안쪽에서 잠긴 문을 바라볼때면 그 커다란 문은 위압적인 남자의 등을 떠올리게 해서 쿄코는 가끔 설레기도 하고 흥분하기도 했다. 안전장치가 있는 폭력은 달콤하여 그녀는 도톰한 입술을 핥고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러나 세명의 더러운 청바지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들은 인형 같은 쿄코의 태도에 겁을 집어먹었거나 흥미를 잃었거나 혹은 몸 속의 정액이 말라붙을리는 없으므로 전의 두가지 이유 중 하나가 맞을 것이다.
 쿄코는 늘씬한 다리를 탁자 위에 쭉 뻗고 그 위에 우유를 약간 흘렸다. 하얀 우유는 갈색 다리를 타고 땅으로 떨어졌다.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흰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그 안에는 무언가가 들어있을테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누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그러는 동안에도 쿄코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육중한 철문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남자는 쿄코에게 입맞추고 맥주캔을 구석으로 던졌다. 맥주캔은 빙글빙글 돌며 황금색 액체를 몇방울 허공에 뿌리고 텅 빈 소리를 내며 바구니로 들어갔다.
 쿄코의 옷과 남자의 옷이 차례로 하늘을 날았다. 남자는 발기가 유난히 잘 돼 기분이 좋았고 오늘은 세번 쯤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와중에 건물을 에워싼 담장은 더욱 심하게 조여들어와 외벽이 가루가루 부서지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방안의 모든 딱딱한 것들은 어느새 헝겊으로 변하여 딱딱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안락하고 푹신푹신하게 느껴졌다. 헝겊으로 된 괘종시계와 헝겊으로 된 냉장고 헝겊렌지 같은 것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만큼 푹신푹신하고 안락해서 그들은 안전한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이 사랑의 과정에 몰두해 있을 때 그들에게서 비롯한 울림이 건물에도 전달되어 밖으로부터 밀려드는 붉은 담장의 공세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초당 수십차례 진동하는 방어막으로 건물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했다.
 이것은 놀랄일이 아니다. 언제나 사랑의 힘은 위대하므로 사람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사랑을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사랑을 가능케 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쿄코의 눈동자로 그녀가 그 순간 무엇을 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남자의 왼쪽 어깨에 난 점? 벽지의 다이아몬드 패턴? 혹은 그녀를 범하기 위해 다시 돌아온 더러운 청바지들?
 남자의 큰 몸이 위에서 누르자 본을 뜨는 것처럼 쿄코의 앙상한 몸이 쇼파 속에 깊게 새겨졌다. 쿄코는 화석이 되는 즐거움에 꺅꺅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