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되기, 되고 싶다 라는 말은 아직 내 상태는 그렇지 않다는걸 의미한다. 이 와중에 손톱이 길었다. 손톱을 자르고 다시. 나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무엇이 그런지는 생략.
나는 김선달의 예를 떠올리는데, 그릇을 만드는 시기가 있고 물을 긷는 시기가 있다. 어떤 '것'이 쓰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만들어져야하고 그 다음에 적시 적소에 쓰인다. 만듦에 치중하다가는 시기를 놓치고 시기를 신경쓰다가는 우물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나는 만드는 중이다.
무엇을 만드냐면, 피와 살과 밥과 시간이다. 하늘 아래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으니 몸 가진 것들은 한자리에 멈춰있나 싶지만 좌로 우로 회전하는 중이어서 중심을 무너뜨리지 않은채로 돌아간다. 그러다보면 알아서 형태를 찾는다. 도기를 빚는 것과 같다.
나는 생각을 빚고 비뚠 몸을 맞춘다. 먹고 그린다. 강하게 돌면 돌수록 나와 밖의 골은 깊어진다. 보여지는 '나'의 혼란은 중심을 잡기 위한 몸부림인데 밖에서는 무질서와 불분명한 경계로 나타난다. 돌다보면 감각은 예민해지지만 현실의 소음에는 둔감해진다. 안정적으로 돌기 위해서 이리 저리 움직여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만든 아빠와 엄마를 생각하면 나는 조금 비틀댄다. 나는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미운건 인간성이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인간성이다. 그런데 내가 미워하는 인간성이 나를 낳고 먹이고 키웠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참되고 이상적인것, 논리적인 완결성을 지닌 명제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오해와 막연한 희망과 불신에서 태어난다. 그걸 먹고 자란다. 무를 수는 없다.
아버지는 무능하지만 멋있고 어머니는 현실적이지만 밉다.
나는 현실적이 되기로 했다. 반항이고 독립이다. 구멍은 없는지 어디가 약한지 시험해보는거다. 깨지면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시위를 놓고 뿌리를 든다. 닮지만 다르다. 태어난 곳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