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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묘사

도서관, 눈

*민트님의 댓글을 읽고 든 생각.


고등학생때 나는 도서관의 휴게실에서 창 밖을 바라보며 자판기에서 뽑은 율무차를 마시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백원인가 삼백원하는 율무차를 제일 좋아했다.

평소보다는 조금 작은 노트에 글을 쓰고 있었다. 아마 자판기 커피에 대한 내용인데, 한국 학생들이 코피를 마시며(흘리며) 공부를 열심히 하느라 많은 커피가 소비된다, 이런 내용의 말장난을 섞은 시를 썼던 것 같다. 눈이 오는 창 밖을 바라보며 문득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에 관한 서정시를 쓰고 굉장히 만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고 그 기세로 자판기 커피에 대한 시를 썼던 것이다. 잠깐 숨을 돌리려고 휴게실로 나와 율무차를 뽑았다. 도서관 안은 따듯했으나 꽉 닫힌 창문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들어오는게 느껴졌다.

창문은 손잡이를 돌리고 밀어서 여는 보통 화장실 같은 곳에 달린 종류였다. 창문을 열자 눈송이들이 길을 잃고 노트 위로 떨어졌다. 찬 바람이 율무차를 식히고 목을 서늘하게 한다. 몽롱함이 달아나고 뺨이 따갑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창밖의 소란을 닫았다. 눈송이는 글자를 물들이고 있었다. 채 녹지 못한 눈송이를 털어내고 남은 율무차를 마셨다. 그리고 오는 길에 산 즉석 복권을 긁었다. 은박을 동전으로 긁고 찌꺼기를 털어냈다. 형광 초록에 검은 글자가 박혀 있었다. 숫자는 당첨번호와 일치하지 않았다. 어차피 재미로 산거였다. 돈을 따고 싶다거나 행운을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저 은박 너머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서 샀다.


이미지, 단어, 문장, 단락의 구분,


쉼표, 섬세한, 


마침표. 


우연의 일치를 바라며 은박을 긁는 사람과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자기만족과 재미에서 비롯한 표현이 무슨 의미가 있나? 질문에 답하기에 나의 세계는 작고 온갖 환영들로 소란스러웠다. 거짓과 자기기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글쓰기를 포기했다. 더이상 글을 지어낼 수가 없었다. 소란에 소란을 보탤 수가 없었다.

살았다. 사람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돌아보지도 않을 말을 하기 위해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이해를 구하기도 하고, 괜히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침묵했다. 침묵이 가득한 거리를 걷고,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