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와 개구리
나는 티브이를 본다. 광고가 흘러나온다. 광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을 엄수하는 것이다.
고기를 구울 때는 직화 xx구이! 이제 고깃집에 갈 필요가 없어요! 안방에서 즐기는 직화 구이! 직화 xx구이!
정해진 시간 안에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려면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한다. 멜로디일 수도 있고, 짧은 문장의 반복일 수도 있고, 독특한 이미지일 수도 있다. 호감이 가는 연예인의 얼굴, 그림 같은 구도의 제품 사진, 반전이 있는 스토리.
저 ㅇㅇㅇ도 즐겨 먹는 직화 구이! 직화 xx구이!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숨도 쉴 수가 없는데,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안된다. 어디까지나 가장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이야기로 화면은 바뀌고 시청자들은 곧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엄마 아빠 함께 즐겨요, 직화 구이~ 직화 xx구이!
멜로디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화면이 바뀐다. 화면에는 이제 머리통인형 박람회를 알리는 공익광고가 나온다. 공익광고는 다른 광고에 비해 얌전하다. 다른 광고들이 필사적으로 떠오르기 위해 물장구를 친다면 공익광고는 플라스틱 오리보트처럼 물위를 유유히 떠다닌다.
광고는 박람회가 열리는 건물을 전경으로 잡는다. 그리고 전시장 내부를 클로즈업한다. 환한 조명 아래 부스들이 칸칸이 나뉘어 있다. 카메라는 씨씨티브이처럼 화면 곳곳을 천천히 내려다보다가 중앙을 비춘다. 경전차가 있다. 경전차는 빨간 초콜렛같은 외피에 네모낳고 노란 창문이 뚫려 있다. 경전차 내부에는 머리통인형들이 있다. 카메라가 경전차 복도를 훑는데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머리통인형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카메라는 운전수 머리통인형을 클로즈업하는데 그건 머리통인형이 아니라 인형의 탈을 쓴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어서 머리통인형은 검은챙이 달린 남색모자를 벗고 인사한다.
머리통인형 엑스포! 꼭 놀러 오세요!
나는 거기까지 보고 티브이를 끈다.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의 정거장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경전차에 오른다. 신분을 확인하고 어른의 요금을 낸다. 머리통들은 앞쪽부터 차례대로 담배곽을 채우듯 앉는다. 나는 맨뒤로 가 구석에 앉는다.
잠이 덜깨서 머리가 몽롱하다. 창문을 조금 열자 차가운 바람에 섞여 타는 냄새가 난다. 깜빡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회사까지는 절반 정도 남았다. 내부의 승객들은 내가 탔을때와는 전부 달라져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양복을 입고 있다. 머리는 깔끔하게 다듬어 귀가 드러나고 짙은 양복과 대비대는 하얀색 셔츠깃이 칼로 자르듯 머리통과 몸통을 구분하고 있다. 여자들은 머리가 길고 밝은 블라우스에 검정 치마, 살색 스타킹을 신고 있다. 나는 뒷목을 손바닥으로 쓰는데 간밤에 자른 머리카락이 웃자란 턱수염처럼 까끌까끌하다.
경전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승객들을 싣거나 버리거나 한다.
회사까지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았을 때 사내가 탄다. 곱슬머리가 땀에 젖어 이마에 붙어 있다. 그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린 빨랫감처럼 맞지 않는 큰 옷을 입고 있다. 그는 빈자리를 살피는데 앞쪽에는 자리가 하나 남아 있다. 하지만 앉을 수 없는데 그가 요금을 내는 사이 자리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바닥에 있던 쇼핑백을 올려뒀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통로 옆에서 여자의 호의를 기다리지만 뒤따라 탄 승객이 헛기침을 해서 떠밀려 맨 뒤로 온다.
나는 자켓 단추를 잠궈 그가 앉을 자리를 비운다. 그에게서는 모텔 스킨냄새가 났다. 나는 무릎을 오므려 그의 바지를 구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상관 없는 일이었다. 옷이 너무 커서 주름이 지는 걸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어딜 가는 길이냐고 묻는데 그건 이미 그도 아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회사의 오리엔테이션에 간다고 하자 그는 마치 맞는 젓가락 한짝을 고생 끝에 찾은 것처럼 반가워한다. 그와 나는 통성명을 하고 신변잡기들을 주고 받는다. 그는 나보다 어려보였는데 사실은 나보다 다섯살이나 많았다.
나이를 착각한 것은 새를 닮은 그의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 때문인데 그건 그의 흰 피부와 대비되어 그를 무척이나 어리게 보이게 하였다.
그는 수면 위의 오리처럼, 끊임없이 자기 이야기를 떠들었다. 내 앞좌석에도 들릴정도의 소리로 말하는데 그 얘기는 그가 먹은 음식이나 부모님의 기대, 재밌게 본 광고 따위가 전부인데다가 그마저도 과장되게 말해서 듣고 있기가 짜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데 그가 관객의 뒷통수를 향해 얘기하면서도 줄곧 내쪽을 바라보며 호응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혹시 요새 광고하는 머리통인형 박람회에 가보았나?
나는 머리통인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야 그가 입을 다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 참 안됐군. 나는 머리통인형을 좋아해서 집에는 머리통인형을 꽉 채워 놓은 방이 따로 있네. 게다가 박람회에 선착순으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한정판 머리통인형을 주는데 내가 열번째로 간신히 받았지. 사실 내 앞에 줄선 사람이 있었는데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입장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받을 수가 있었던거야.
-그거 참 잘 됐군요.
-천국이야, 천국. 하긴 자네는 머리통인형을 좋아하지 않으니 관계없겠지만. 그래도 그거는 일반인들도 볼만하네.
-그거요?
-전시장 한가운데에 실물 크기의 머리통인형이 있어. 실제 경전차인지 모형 경전차인지 모르겠는데 경전차도 실물 크기지. 그 안에 머리통인형이 가득 들어있는데 실제 사람 크기야.
-머리통이 실제 사람만한가요?
-그건 아니고... 그렇게 해버리면 고유의 특색이 사라지니까. 그럴바에야 실제 사람을 갖다두는게 낫지. 몸통은 어린아이정도만하고 머리통이 나머지 절반만하다고 보면 될거야. 회사에서 어떤 조각가에게 부탁해서 작업한거라는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솜씨가 기막히더군.
-그래요?
-대단한건 말이지, 기존의 머리통인형에 대한 관점을 아예 뒤바꿔 놨다는거야. 머리통인형은 알다시피 머리통에 특징이 들어있고 몸통은 상대적으로 덜 신경을 쓰지 않나? 그런 고정관념을 바꾸어 놓았지. 이 머리통인형들의 머리통은 특징없이 서로 비슷하게 생겼는데 몸은 무척이나 사실적이야. 이를테면 저 운전수 보이나?
그는 앞쪽의 운전수를 가리킨다. 경전차는 건널목앞에서 정차중이고 운전수는 창밖으로 담배연기를 뿜고 있다.
-저 운전수의 하얀 장갑까지도 그대로 재현을 해놨는데, 손에 딱 맞는 장갑 아래로 피부의 굴곡이 느껴질 정도라니까.
-대단하군요.
-나같이 수집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대단한 충격이었어. 실제 사람이 머리통 안에 들어가 있는 줄 알았다니깐! 회사니까 돈을 들여서 만들 수 있는거지. 일반인들은 상상 할 수 없는 스케일이야.
경전차가 출발한다. 경전차는 언덕을 오르는 중이어서 섬의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나는 수평선을 바라보는데 섬 세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경전차가 움직일때마다 먼 쪽의 꼭지점이 다른 섬쪽으로 기울어서 마침내는 합쳐진다. 삼각형은 사라지고 두 점만 남는다.
나는 그쪽이 남동쪽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는 합격자들에게 회사의 팜플렛이며 사업분야에 대한 소개와 섬에 대한 소개 팜플렛도 같이 보냈다. 합격자들은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의 관광 가이드에는 섬의 볼거리들이 실려 있었고 남동쪽의 항구에 대한 내용도 실려 있었다.
남동쪽의 항구에서는 아버지가 고기를 잡았다. 어릴적에 몇번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탄적이 있는데 빨간색, 초록색 버튼이 많이 달린 계기판을 보고 신기해 했었다. 나는 아버지의 모자를 쓰고 선장이 되었고, 아버지는 노련한 선원이 되어 태양을 보고 방위와 시간을 짐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방법은 섬을 떠나면서 전부 잊었다.
항구를 점으로해서 남쪽 바다에는 세 섬이있고 마름모의 형태를 이루는데 섬의 이름은 형섬, 동생섬, 황구섬이다. 섬에는 각각 하나씩 등대가 세개가 있다. 형제섬의 등대는 불이 꺼진지 오래고 사용하는 것은 황구섬의 등대뿐이다, 라고 관광 가이드에는 나와있었다.
나는 해를 바라보고 위치를 짐작하다가 포기한다.
경전차가 멈추고 종점인양 사람들이 모두 내린다. 빨간 철골 다리가 바다를 향해 뻗어 있고 컨테이너가 블럭처럼 쌓여 있다. 크레인과 거대한 선박을 배경으로 회사의 건물이 서 있다. 바닷바람이 쌀쌀해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우리는 안내자의 인솔에 따라 회사에 딸린 낮고 긴 낡은 건물로 들어간다. 오리는 내 어깨를 툭치고 대열의 앞쪽으로 빠르게 뛰어간다. 그는 한정판 머리통인형이 받고 싶은 모양이다.
우리는 체육관으로 쓰이는 듯한 넓은 공간으로 들어간다. 구둣발의 침입에 반들반들한 나무바닥이 비명을 지른다. 농구대 몇개가 있고 배드민턴코트를 암시하는 선이 바닥에 그려져있다. 강당의 끝에는 무대가 있고 무대 앞줄로 십여개의 의자가 줄지어있다. 안내자는 머리통들에게 벽에 있는에 의자를 꺼내 정렬하는 걸 지시한다.
나는 벽에 아이스크림콘마냥 끼어있는 의자 몇개를 들고 온다. 회색의자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가볍다. 안내자는 의자를 운반하는 사람과 줄을 맞추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자네! 그렇게 하면 뒤쪽 정렬이 다 엉망이 되잖아! 의욕만 앞서지말고 자기가 뭘하는지 보란 말이야!
소란의 중심에는 작고 통통한 사내가 있는데 그는 안내자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되뇌인다. 안내자는 그에게 가서 의자나 나르라고 지시한다. 사내는 내쪽으로 와서 꼽힌 의자를 빼는데 너무 꽉 눌려 있어 잘 빠지지 않는다. 나는 다가가 그가 빼는 걸 도와준다.
-오, 고마워요!
그는 조금 긴장된 말투로 외치듯 말한다. 나는 별거 아니라고 하고 그를 따라 뒤쪽에 의자를 배치한다.
그의 행동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있다. 그는 의자를 내려놓고 의자를 반바퀴정도 바닥을 끌며 돌려 놓는다. 그리고 의자 앉는 부분과 등받이를 마치 식당에서 테이블을 걸레질하는 사람처럼 양복의 팔뚝으로 훔친다. 자신의 배치에 대해서 뒤로 살짝 나와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바라본다. 그리고 주변의 행동을 곁눈질하여 의자를 너무 줄세워 놓지도 않고 헝클어 놓지도 않는다. 만약 주변의 의자들이 너무 심하게 헝클어져 있으면 그보다 줄세워 놓고, 줄세워져있으면 헝클어 놓아서 그가 배치한 의자들은 눈에 띈다. 그는 벽으로 의자를 가지러 가면서도 자기가 배치한 의자를 계속 확인하는데, 정렬하는 사람들이 의자를 줄에 맞추면 그때서야 다음 의자를 옮기는 것에 집중한다.
-자자, 앞으로 세줄만 더 하면 되니까 얼른 해치우자고. 대학에서 이런 것도 잘 배워왔겠죠?
안내자의 격려에 실내는 구둣발소리로 가득하고 이내 사람들은 자기가 분류한 의자에 앉는다. 내 왼쪽으로 통통한 사내가 앉는다. 그는 자켓 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한다. 셔츠의 가슴팍이 땀으로 흥건하다. 그는 속주머니에서 팜플렛을 꺼내 부채질을 한다. 미간에도 땀방울이 맺혀있다. 그는 연신 코를 찡그리며 입술을 씰룩이는데 입이 둥글고 커서 꼭 개구리의 주둥이를 닮았다.
강당은 열기와 숨소리 간혹 들리는 기침 소리를 제외하면 조용하다. 개구리가 나를 향해 속삭인다.
-오티때 잘보여야지 본사로 발령이 난대요.
할아버지가 숨겨놓은 꿀단지 위치를 아는 아이처럼 개구리는 들떠 말한다.
-저희 사촌형이 본사에 근무하거든요. 사촌형도 본사에 다니는데 오티 때가 정말 중요하데요.
-인턴때가 중요한거 아닌가?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는 지금 모인 사람들 중에 인사 담당자들이 섞여 있대요. 그들이 신입사원 옆에서 신입인 것처럼 몰래 판단한대요.
나는 헛기침을 하고 그에게 말한다.
-자네 지방으로 발령받고 싶나? 기밀 사항을 떠들면 어떡해? 내 본사에는 자네에 대해 특별히 따로 말해 두겠네. 입이 가볍다고 말이야.
-네? 아, 아니. 사촌형이...
-사촌형 이름이 뭔가? 부서랑 말해.
-아, 그, 그게 아니고...
나는 그에게 농담이라고 한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을 편다. 그리고 몇번을, 진짜로 인사 담당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그보다 한살이 많았는데 내 나이를 상기시켜주자 그는 진정이 되는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는 농담을 좀 주고 받다가 안내자가 조용히 하라고 하자 멈춘다.
반백의 노인이 들어와 무대 위에서 자기 소개를 한다. 회사의 임원이다. 그는 회사의 비전이니 사업분야니 진작 나눠준 팜플렛에서 벗어나지 않는 얘기를 반복한다. 억양이 고조가 없고 느려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든다.
꿈에서 나는 빨간 철골 구조 위를 걷고 있었다. 바로 옆은 까마득한 바다여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중심을 잃을 것 같아서 나는 앞으로 계속 갈 수 밖에 없었다. 삼분의 일정도를 가자 다리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내려갔다. 뒤는 쭉 뻗어있고 그 끝은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앞을 보니 다리가 절취선마냥 잘려 있다. 끝을 앞두고 여자가 절을 하고 있었다.
다가가니 여자는 절을 하는게 아니고 요가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신이었는데 그녀가 요가의 동작을 취할때마다 등의 잔근육과 뼈가 튀어나온 게 뚜렷하게 보였다. 나는 몇발자국 뒤에서 그녀의 동작을 바라보는데 동작은 천천히 이어져서 마침내 그녀는 잘린 다리를 향해 절을 하듯 몸통을 숙였다. 흙이 묻은 발뒤꿈치와 옹기종기 모인 발가락, 새하얀 엉덩이가 보였다. 나는 엉덩이 사이를 보기 위해 조금 더 다가갔다. 엉덩이 사이는 털이 짙어서 속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옆으로 돌았다. 그녀는 양팔을 앞으로 늘어뜨리고 이마를 땅에 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몸을 굽히고 머리카락을 걷었다. 머리사이에 손가락을 대자 머리통이 툭하고 떨어진다. 머리통은 또르르 굴러서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통은 씨앗처럼 머리카락을 회전하며 천천히 날았다. 머리통은 바람을 타고 위로 아래로 물결치듯 움직이더니 점이 되어 바다에 박힌다. 거기에는 점이 두개가 더 있어서 머리통은 하나의 꼭지점이 되어 다른 섬들과 삼각형을 만든다.
나는 몸통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내 옆은 까마득한 바다다.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빨간 철골을 따라 걷는데 삼분의 일쯤 지나자 계단에는 운전수가 앉아있었다. 그는 한손으로 담배를 피며 다른 손을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으나 동전은 없다. 어쩔 수 없이 대신 머리통인형의 머리부분을 주었다. 운전수는 몸통은 어딨냐고 물었다. 나는 다리 끝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는 위약금으로 삼십배를 물어야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가져오겠다고 했다. 그는 손을 치워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나가려는데 그가 밀었다.
떨어지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요금을 내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어, 라고 했다.
나는 의자에서 균형을 간신히 잡으며 일어난다. 해가 강당의 창에서 쏟아지고 종이 팔랑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난다. 나는 부끄러웠다. 개구리는 대신 받은 서류를 건내준다. 그는 서류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자리에 고쳐 앉으며 서류를 허벅지 사이에 둔다. 발기를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리통들은 까딱이며 서류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발기한 건 나뿐이다. 나는 종이를 발기의 중앙에 위치시킨다. 종이와 허벅지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생긴다. 양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손을 대지 않기 위해 종이를 섬세하게 움직인다. 종이는 잠깐 허공에서 균형을 유지하다가 구부러져 양 끝이 허벅지에 닿는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배가 고프다.
그녀는 외국에서 왔다고 했다. 어렸을 때까지는 섬에 살다가 외국에 나가서 들어온게 삼년전이라고 했다. 말을 자연스럽게 잘한다고 하니 잊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했다.
배식은 강당 옆에 있는 식당에서 이루어졌다. 개구리와 헤어지고 사람들 틈에 섞여 밥을 받아 긴 테이블에 앉았다. 접이식테이블은 다섯개정도가 붙어서 긴 줄을 만들고 그런 줄이 열개정도가 있었다. 사람들은 전차의 자리에 앉는 것처럼 차곡차곡 무관심을 보태며 앉았다. 그래서 그녀가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을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잠시 후에야 나에게 질문한 거란걸 알고 그러라고 했다.
그녀는 왼손에 숟가락을 들고 오른손에는 젓가락을 쥐고 밥을 먹는데, 어설프다. 젓가락질은 번번히 실패하는데 그럴때면 젓가락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식판 귀퉁이에 젓가락 끝을 맞춘다. 다시 천천히 반찬을 집는다. 그녀는 밥을 먹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반찬을 집어 한술 뜬 밥 위에 올려 놓는게 중요한 것 같다. 반찬을 올리고 젓가락을 귀퉁이에 모아 두고 밥을 먹은 뒤 숟가락을 오른손으로 옮겨 쥐고 국을 한수저 뜬다. 그리고 천천히 오물거리고 삼킨다.
이 동작들은 느리지만 부드럽게 이어져서 나는 밥을 먹으면서 그걸 바라본다. 내가 밥을 다 먹었을 때 그녀는 겨우 삼분의 일 정도를 먹은 뒤다. 나는 배식대로 가 밥을 더 받고 물 두잔을 떠 한잔은 그녀 옆에 둔다. 그녀는 오물거리는 걸 멈추고 눈으로 고맙다고 한다. 젓가락 끝을 다시 맞춘다.
아침을 거른 터라 두그릇을 먹었는데도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두공기째는 천천히 먹었는데 그래야 그녀의 속도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식판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커피나 한 잔 마시자고 한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나가자 머리통들이 옹기종기 모여 기지개를 켜거나 담배를 피거나 하고 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빨간 다리가 바라보이는 그늘 아래 선다. 빨간 철골은 사십오도정도의 각도로 옆을 보이며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데 끝이 절취선마냥 잘려 있다. 몇십년 전에 전쟁이 있었고, 다리는 그때 끊겼다. 폭격에 의한 건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건지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끊어진 다리를 따라 가상의 선을 연장한 끝에 육지가 보인다. 다리는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있고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고 관광 가이드에서 보았다.
회사부지는 다른 지대보다 조금 높고 해풍을 막기 위해 나무들이 둘러 있다. 나무를 따라 나와 그녀는 천천히 걷는다.
-외국에서 왔다고요?
그녀는 뒷짐을 지고 두발자국 정도 앞서서 걷는다. 그녀는 잠시 멈춰서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구름이 좀 떠 있고 맑다. 그녀는 바다를 가리킨다. 손가락 끝이 빨간 다리와 직각을 이루며 바다로 뻗는다.
-쩌어기서 왔어요.
-너무 막 가리키는거 아니에요?
그녀는 웃는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이 맞다는 걸 안다.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은데 나에게는 그게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증거로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우리는 방풍림의 절반정도를 걷고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항상 내 앞에서 걸었는데, 잠시 걸음이 빨라지면 조금 멈췄다가 또 조금 달아나서, 나와 그녀의 거리는 세발자국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는데 나는 처음으로 이 추격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다. 가는 목과 쇄골 사이의 실금 같은 목걸이를 본다. 낯익은 풍경. 아마 내가 꿈을 많이 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앞쪽으로 태양이 떠 있었고, 반환점을 돌자 태양을 등지게 되어 그녀는 자신이 만드는 그림자를 쫓는다. 그건 밥을 먹을 때처럼 순서가 있는 일이어서, 그녀는 발끝에 생긴 그림자를 차분히 쫓는데 멀어질수도 더 가까워질 수도 없다. 그녀는 자기의 꼬리를 쫓는 고양이처럼 그림자의 끝을 따라 가는데, 방풍림 사이로 바람이 불고 소금기가 그녀의 목덜미에 묻어 반짝인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는다.
이대로는 영원히 가까워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내가 돌아서 그녀의 뒤를 쫓는다면 나는 내 그림자를 쫓는 것처럼 그녀와의 거리를 영영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다. 파도에 떠밀려간 모래삽을 바라보는 아이처럼 그녀는 망연히 바다를 바라본다.
퍼뜩, 그녀는 사과한다.
-제가 또 정신을 놓고 있었나봐요. 미안해요.
그녀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같은 속도로, 서로가 보이지 않는 간격으로 걷는다. 우리는 경전차와 머리통인형과 개구리에 대해 얘기한다. 나는 비밀도 털어놓았는데 사실 회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녀는 어떤 그림을 그리냐고 묻고, 나는 외국어회화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녀는 웃는데, 웃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건물에 다다르자 그녀는 건물의 먼지가 쌓인 유리창에 글자를 적는다. 로마자와 유사한 글자는 알파벳은 아니어서 읽을 수 없다. 그녀가 흘겨보자 나는 변명한다.
-읽고 쓸 줄은 몰라요.
그녀는 웃는다. 뭐냐고 묻자, 이름, 이라고 한다. 나는 글자의 모양을 기억한다. 건물의 입구에서 그녀와 헤어진다.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다.
개구리가 나를 알아보며 뛰어온다. 그는 뻔한 질문을 하고 나는 뻔한 대답을 한다. 개구리는 그녀가 누구냐고 묻고 나는 모른다고한다.
-옛날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옛날? 초딩때? 동창?
-글쎄. 그거보다 훨씬 더 옛날에.
개구리와 나는 개구리가 본 예쁜 여자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개구리가 맘에 든 여자는 매끈한 스타킹을 신은 다리가 가는 여자인데 힙이 작아서 옷맵시가 좋다고 했다. 가서 연락처라도 물어보라고 하니, 개구리는 부끄럽다고 한다. 그리고 개구리는 자기가 좋아했지만 자기를 좋아하지는 않은 다른 개구리들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너무 구구절절하고 길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는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 시청각실로 나뉘어 들어가 회사에서 투자, 기획한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세기말을 그린 영화인데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이 짜집어진 B급 영화였다. 커플은 죽음이 달린 생사의 위기에서도 개고기를 먹느니 먹지 않느니 하는 걸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고기를 먹을 때는 너무 맛있게 먹어서 나도 먹고 싶어질 정도였다. 나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어두컴컴한 시청각실에서 프로젝션으로 띄워진 화면과 싸구려 스피커의 왜곡된 소리 속에서 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여전히 방풍림 사이를, 그림자 끝을 쫓고 있었고 태양은 그녀에게만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맨발이었고, 순서를 따라 차분히, 모래 위에 그녀는 사뿐히 남았다. 나는 그녀의 뒷꿈치를 따라갈 뿐이었다. 간격은 좁아지지 않았고 반환점은 없어서 이번에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난뒤 사람들은 강당에 모였다.
커다란 화이트 보드에는 알파벳이 내림차순으로 적혀있고, 대문자 이니셜 아래에는 이름들히 빼곡히 적혀 있다. 강당에는 이니셜이 적힌 판넬이 띄엄띄엄 있어서 사람들은 이름을 확인하고 배정받은 판넬 앞으로 모인다. 나와 개구리는 D조다.
D조에는 눈에 띄게 훤칠한 남자가 있어서 모인 사람들은 모두 그를 힐끔 쳐다본다. 그는 모든게 남들보다는 1.5배씩은 커서 머리통 하나가 다른 머리통들 사이에서 툭 튀어나온다.
-오우, 우리 D조 동기들 반가워, 반가워요, 형, 누나, 동생님들. 동기님들 반가워.
그는 여자에게는 악수를 청하고 남자에게는 어깨동무를 하며 친근함을 표시하는데 억양이며 말투에 친근함이 묻어나와서 사람들은 계면쩍어하면서도 그에게 호응해준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하는데 손아귀가 우악스럽다. 내 손보다 1.5배는 더 큰 그 손은 그러나 아귀힘이 센건 아니어서 나는 내 손이 짜부라지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줘 버틴다. 그는 악수를 마치고 과장스럽게 악수한 손을 털고 낮게 휘파람을 불며 나를 바라본다. 그의 관심은 금새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았고, 개구리는 어느새 그의 표적이 되어서 그는 개구리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사람 사이를 돌아다닌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과장되어 보일 그의 동작들은 그의 큰 체구와 어울려서 자연스러워 보인다. 개구리는 끌려다니면서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는데 덕분에 매끈한 스타킹을 신은 여자들과 인사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내자는 각 조별로 몇명씩을 불러서 책자를 나누어준다. D조에서는 개구리가 큰 사내와 같이 가서 책자를 받아온다. 책자는 전년도 신입사원의 오리엔테이션 활동을 기록한 팜플렛으로 빳빳한 종이가 알록달록한 색으로 치장이 되어있다. 책자의 첫장에는 양쪽으로 인사말이 두개가 있고 밑에는 미소짓는 남자의 증명사진이 있다. 그들은 약간의 주름과 실금처럼 얇은 안경을 제외하고는 흡사하게 생겨서 책자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를 한 것 같다. 사진 아래에는 물류와 화학분야를 담당하는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누가 형이고 동생인지는 적혀있지 않아서 주름을 보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책자는 위문공연단 같은 사진들이 잔뜩 찍혀 있다. 머리통들은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부채춤을 추기도 하고 달이나 나무같은 무대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거지와 신사가 되기도 하고 섬과 등대가 되기도 한다. 알록달록한 사진 아래에는 무채색의 양복을 입은 머리통들이 알록달록한 옷감을 들고 진지한 토론을 벌이는 사진이 있다. 나는 알파벳으로 표시된 전년도 신입사원들의 기록사진을 넘겨 보는데 어떤 낯익음에 앞으로 넘겨서 확인한다. B조에서 옷감을 들고 토론을 하는 남자는 G조에서 종이에 긴 자를 들고 무언가를 측정하고 있다.
나는 그가 기존의 사원, 안내자여서 우연히 찍힌 것인지 책장을 넘기면서 확인한다. 그는 꽤 이곳저곳에 찍혀있는데 머리스타일과 이마에 삐죽 내려앉은 더듬이 같은 머리카락이 그를 다른 머리통과 구분했다. 그는 기존의 사원은 아닌게 분명하다. 책장의 마지막에는 증명사진이 졸업앨범처럼 칸칸이 나뉘어 있는데 나는 거기서 그를 발견한다. 그는 B조이기도 하고 G조이기도 하고 무대에서 표창을 받는 우수사원이기도하고 팔뚝을 걷어붙이고 족구를 하는 운동선수이기도 했다. 그를 사진속에서 찾는 것은 어릴때 그림책에서 숨은 사람을 찾는 것 같이 재미있었는데 차이라면 팜플렛의 머리통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찾기가 훨씬 힘들다는 것 뿐이다.
찰칵-차착 착-
셔터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머리통만한 카메라를 든 사진사가 카메라의 액정을 확인하고 있다. 그는 다이얼을 돌려 확인하고 다시 셔터를 누르고를 반복하는데 어떤 표정도 짓지 않아서 그가 찍으려는 대상이 잘 담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재난현장의 임시거주지에서 가족을 찾는 것처럼 그는 모여앉은 알파벳 사이를 돌아다닌다. 때때로 멈춰 셔터를 누르고 다이얼을 돌린다. 그의 표정에 아주 약간 변화가 생기는데 렌즈 끝은 개구리와 어깨동무를 한 큰 사내를 향하고 있다. 그 역시 표적을 발견한 것이다.
안내자가 마이크 테스트를 한다.
-아아, 테스트, 테스트. 주목하세요. 지금 받아보신 책자를 잘 보세요. 여러분들이 내일 할 것인데요. 내일 회사에서 기존 사원들과 임원분들이 여러분이 앉아계신 이 자리에 모입니다. 앞으로 회사 생활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는 너무 진지하고 야심찬 모습 말고도 재미있고 유쾌한 모습도 보여줘야겠죠? 회사가 세계적인 경쟁을 하기 위해서는 사원들 부터가 창의력을 가지고 자기표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만 섬사람들은 자기를 표현하는데 인색하단 말이에요. 하지만 회사는 틀에 박힌 것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창의적이고 자기표현에 능한 사람을 뽑습니다. 물론 이걸로 인사평가를 매긴다거나 그런 건 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은 회사에 뽑인 자랑스러운 사원들이고 이미 창의적이고 자기표현에 능한 인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자신감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뽐내면 됩니다!
안내자가 얘기를 할때 그를 촬영하는 비디오 카메라가 있다. 안내자는 알파벳들을 향해서가 아니고 약간 벽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해야 조명이 그의 전신을 고루 비추어서 화면에 잘 잡히기 때문이다.
안내자는 알파벳들에게 질문을 받는다.
-아, 그런 것이라면 걱정 마세요. 회사는 여러분들에게 아티스트가 되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 마케팅 부서에서 사람이 나올거에요.
그는 아티스트를 발음 할때 혀를 심하게 굴리고, 스스로의 재치에 감탄하며 웃는다. 머리통이 손을 든다.
-F조. 뭐라구요? 잘 안들립니다. 크게 말하세요.
지적받은 머리통의 얼굴이 빨개진다.
-옳지. 이제야 좀 들리네요. 회사 생활할 때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는 기본입니다, 숙지하세요. 촬영팀, 잠깐만 촬영 멈춰주세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 준비물과 해야할 것들은 이미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냥 몸만 잘 따라서 움직이면 되는거에요. 머리통, 아니 머리는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는 촬영을 다시 지시한다.
누군가 기발한 질문을 던지고, 좌중에 웃음이 터진다. 안내자도 유쾌하게 웃으며 그를 칭찬한다. 카메라는 질문자를 향한다.
-좋습니다! 리더가 되려면 유머감각이 필수죠. 동료 사원들에게 사랑 받는 사람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유머감각입니다. 우리가 환영공연을 하는 것도 이런 유머러스함이 단체생활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안내자는 말을 마치고 농담을 몇마디 던지는데 웃기지는 않았지만 좌중에는 웃음이 터진다. 질문을 받는 동안 무대 아래에 박스들이 옮겨져온다. 안내자는 조별로 몇명을 뽑아 박스를 가져가게 한다.
D조의 박스 안에는 빨갛고 노란 부직포가 둥글게 말려있다. 안내자는 오늘의 일정이 끝났다고 하며 박스는 판넬 아래에 두고 배정받은 숙소로 돌아가라고 한다. 저녁식사 시간을 알려주고,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시내로 나가도 상관없다고 한다.
-너무 과음은 하지 마세요! 내일 공연을 잘할 필요는 없지만, 안나온다던가 하면 실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껏 합격해서 오리엔테이션때 탈락하면 그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겠죠? 알아서 잘 판단하세요.
안내자는 앞으로의 일정을 간단히 소개하고, 강당 밖을 빠져 나간다.
남은 사람들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데 다른 조에 있던 오리가 나를 발견하고 부른다. 그는 F조에 있는데 사람들은 내가 다가가자 목소리를 낮추고 내쪽을 흘긴다. 내가 오리에게 다가가자 그들 중 한명은 열려 있던 박스를 닫는다. 자연스럽게 박스 앞쪽으로 한두걸음 나와서 시선을 차단한다.
-자네 식사는 잘했나?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요.
-좋겠구만. 나는 배탈나서 죽겠어. 화장실을 몇번을 들락거렸는지. 게다가 이딴 장기자랑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거야. 하루니까 참지 이짓을 회사 내내 해야한다면 그냥 다른 일을 하겠어.
오리는 신세를 한탄한다. 그의 오리를 닮은 까만 눈동자가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F조의 중심에 서 있는 여자가 오리에게 참여를 재촉한다. 오리는 나에게 가봐야겠다고 하고 조로 모이는데, 바로 화장실이 급하다고 한다. 오리는 뒤뚱뒤뚱 강당밖으로 빠져나간다. 오리가 빠져나가고 머리통들이 대화한다.
-오리씨, 눈이 너무 크지 않아?
-큰 건 상관 없는데 자꾸 훔쳐봐요, 재수없게.
-그렇게 안봤는데.
-오리 형이 좀 밝히는 구석이 있죠. 뭐 나이가 있는데.
-나이가 몇살인지 알아요?
-헐. 진짜? 대박. 완전 아저씨네.
-늙을수록 밝힌다잖아요, 이해해야지.
-그게 이해가 간단 말이야?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는거죠. 꼴에 동긴데.
-근데 어디간거야?
-똥싸러갔겠죠, 아까부터 계속 뭐를 맡아달라니 배가 아프다니 하더라구요.
-으으, 내가 화장실 갔을때 있었는데 냄새가 장난이 아니야. 으으, 소리도!
-괄약근이 약한가봐요. 나이 들어서 그런가.
-나이 때문은 아니고 다른 취향이 있을 수도 있지. 오리형이 좀 반반하잖아?
-ㅋㅋㅋㅋㅋ. 못됐어.
-근데 혹시 오리씨 그거, 나만 거슬리나요? 자네, 자네 그러는거.
-나도, 나도. 무슨 영감탱이도 아니고, 아니면 나이 대우 해달라는건가?
-나는 말투는 괜찮은데 제발 훔쳐보지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리 좀 그만.
-똥싸개.
-엉덩이도 보겠지?
-늙어빠진 영감탱이.
-괄약근이 약한 남성.
-아마 가슴도 보고 있을거야. 엉덩이도.
카메라는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촬영하는데 오리가 빠진 F조도 찍는다. 박스를 두고 토론 하는 모습은 훌륭한 촬영감이다. 카메라는 머리통들의 진솔함을 담은 발제와 의견조율, 합의를 도출해내는 과정을 빠짐 없이 기록한다. 그들은 창의성은 물론이고 유머러스함까지 겸비해 한마디 한마디 할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들은 토론이 끝이 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며 저녁을 먹고 2차로 옮겨서 토론을 마저 하기로한다. 2차때는 오리를 포함해 토론을 진행하기로 하는데, 오리의 시선에 기분이 나빴다는 여자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계획한다. 그녀는 과연 오리가 자신의 다리만 보는지 엉덩이와 가슴도 보는지 증명해 보이겠다고 한다. 남자들은 그녀의 엉덩이와 가슴을 찬탄하고, 그녀는 웨이브를 춤으로써 엉덩이와 가슴의 굴곡을 드러내는데 덕분에 무리의 열기가 한층 고조된다.
나는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사람들은 강당에 알파벳으로 모여 공연을 위한 준비를 한다. 회사에서 나온 사원은 각 알파벳에 할당된 공연의 내용을 설명해준다. D조는 경전차를 위한 군무를 춘다. 사원은 카세트 테입으로 음악을 재생하는데 민속음악 같은 타악기의 리듬이 흘러 나온다. 타악기의 리듬은 처음에는 단순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복잡해진다.
사원은 D조의 인원을 세조로 나눈다. 그리고 박스안에 있는 부직포를 각자에게 나누어준다. 빨간 부직포는 원통형으로 되어있고 안쪽에는 딱딱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안에 들어가 손잡이가 있어서 들어가 손잡이를 잡으면 머리가 툭 튀어나온다. 부직포는 앞뒤로 연결할 수 있는 고리가 있어서 고리를 연결하면 사람들은 경전차가 된다.
큰 머리통은 남들보다 머리가 하나 더 튀어나와서 제일 앞에 선다. 나는 그의 뒤에 서고 내 뒤에는 개구리가 선다. 그리고 그 뒤에 다른 머리통들이 선다. 우리는 세번째 경전차다.
사원은 종이를 나누어주는데 우리가 추게될 군무가 나와있다. 벤다이어그램처럼 경전차는 따로 돌기도하고 엇갈려 돌기도하고 서로의 꼬리를 잡았다가 흩어지기도 한다. 어느 박자에 어떤 방향으로 돌아야하는지가 종이에는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동작 자체는 어려운게 없어서 앞부분의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쓰면 된다.
머리통들은 첫날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습한다. 곳곳에서 말소리가 들리고 웃음 소리가 들린다. 아침연습이 끝나고 사람들은 점심을 먹기 위해 흩어진다.
그녀는 혼자 앉아 있다. 나는 개구리에게 따로 먹겠다고 한다. 개구리는 큰 머리통과 친해져서 경전차 무리를 따라 간다. 식당은 어제와 같은 경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들며 밥을 먹는다. 나는 그녀에게로 가서 옆에 앉아도 되냐고 묻는다.
밥을 먹는 순서는 변하지 않는다. 어제와 같이 천천히 그러나 계획적으로. 나는 그녀의 속도에 맞춰서 밥을 먹는다. 그녀는 손톱에 핑크색을 칠했다.
-뭐해요, 거기는?
-연극인데, 잘 모르겠어요. 저는 구름이어서.
-구름?
-네. 뭉게구름이요. 하얀 복실복실한 구름.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 양 옆으로 둥글게 만다. 그리고 볼에 바람을 넣는다.
-재미 없어요?
-재미 있죠. 저는 구름이 좋으니까.
-표정이 별로 안좋아보여서.
-음, 생각했던거랑은 좀 다른 것 같아요.
-뭐가요?
-섬이. 제 어렸을적 기억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밥을 먹고 시간이 남아서 나는 그녀에게 걷자고 한다.
밖은 흐려서 금새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다. 바다는 짙은 남색으로 물결이 촘촘히 흐른다. 빨간 철골다리는 그림자가 져 어두워 보인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거칠게 훑는다.
담배 하나를 다 태울 때쯤 팔뚝에 따스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녀는 연회색 후드자켓을 걸치고 있다. 그녀가 준 캔을 주머니에 넣는다.
-아직 적응이 끝나지 않아서 그런거 아닐까요?
그녀의 후드는 팔이 길어서 그녀의 손끝이 조금 밖으로 솟아있다. 끝은 연한 핑크색.
-사람들하고 어울리기가 어려워요. 제가 다른 곳에서 자라서 그런가봐요.
-친구 아직 못 사귀었어요?
-친한 동생이 생겼는데 집에 일이 생겨서 아침에 떠났어요. 저만의 동생은 아니죠. 아주 밝은 아이여서 모든 사람들의 동생이고 언니, 누나니까. 이것도 동생이 해준거에요.
그녀는 후드 밖으로 손을 꺼내 손등을 모은다. 손가락이 시작되는 마디가 그녀가 손가락을 쫙 펴자 보조개처럼 살짝 파인다. 핑크색은 잘 발려있는데 오른손 새끼 손톱만 두껍고 층이 져있다. 내 시선에 그녀가 후드 속으로 손가락을 감춘다.
-제가 칠해서 그래요.
그녀는 어릴적에 클래식기타를 배워서 그 후로 손톱을 칠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기타를 더이상 배우지 않는데도 습관이 남아서 뭔가를 바르는 건 영 어색하다고 한다.
-음, 작은 신발을 신은 느낌? 숨을 못 쉬는 것 같아서요, 손톱이.
우리는 걷는다. 그녀의 바다를 닮은 짙은 남색치마는 싸리눈 같은 하얀 무늬가 가득하다. 바람에 외곽이 부풀어서 짙게 영근 꽃봉이리처럼 보인다.
반환점에 다다라서 나는 그녀에게 돌아가자고 한다. 그녀는 어깨너머로 나를 보더니 웃는다.
-조금만 더 가요. 저기까지만.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더 걷는다.
나무 사이로 수면에 컨테이너 박스를 실은 선박이 보인다. 그녀는 나무 아래에서 허리를 굽히고 나무 사이를 바라본다. 크레인이 컨테이너 박스를 들어 선박 위로 차곡차곡 포갠다. 박스는 좌로 우로 쌓아서 나무블럭 놀이가 떠오른다. 손가락으로 컨테이너 박스를 치는 상상상을 한다. 컨테이너 박스는 퐁하고 날아가 바다에 빠진다. 박스는 안이 비어서 물위에 둥둥 뜬다. 박스는 떠밀려 수평선 쪽으로 향하는데 거기에는 두개의 섬이 있다. 박스는 그 사이에 멈춰서 하나의 꼭지점이 된다. 세 섬은 삼각형을 이룬다.
-이거봐요.
그녀 옆으로 다가간다.
-컨테이너박스가 블럭 같이...
-이거, 이거. 쉿.
그녀는 팔을 잡아당겨 나무 사이 풀숲을 가리킨다. 미끈한 노란색 선이 풀사이를 천천히 지나가고 있다. 톱니 같은 초록색 잎사이에서 손가락 굵기의 노란 뱀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뱀의 머리와 꼬리는 풀에 가려 보이지 않고 몸통만 보이는데 물결처럼 좌우로 흔들린다. 끝과 시작을 짐작할 수 없어서 길이를 알 수가 없다. 노란 물결은 얼마간 흔들리다가 끝이 나타난다. 꼬리는 천천히 흔들리며 나무 밑동으로 사라진다.
-저런 뱀은 열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섬은 제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인가봐요.
그녀는 웃는다. 우리는 새로운 반환점에서 돌아온다. 돌아올때는 같은 간격으로 걷는다. 같은 거리에서는 앞모습도 뒷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침묵과 숨소리, 겹치는 발자국으로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건물 앞에서 우리는 헤어진다.
-다음에 또 봐요.
나는 그녀의 이름을 덧붙인다.
-알았네요? 어떻게?
이번에는 내가 웃는다.
나는 그녀에게 다음에 만날 때는 내 이름도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알겠다고하고, 헤어진다. 나는 따듯한 캔을 마시고 강당으로 들어간다.
리허설을 마치고 저녁을 먹는다. 해가 기울고 있고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건물 처마 아래에 모여있다. 한 사람이 건물 밖으로 천천히 나온다. 그는 짐을 매고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시고 우산을 피며 그에게 달려간다.
내가 옆으로 뛰어가자 그는 놀라는 눈치다. 그리고 나를 확인하고는 다시 어깨를 떨구고 걷는다.
-자네였구먼.
-어디 가시는 건가요?
-그게, 그냥 그렇게 됐어.
그는 천천히 걷는다. 지금의 그는 수면 아래에서 먹이를 찾는 오리 처럼 고개를 땅에 박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사람 일이라는게 어떻게 될지 모르지. 뭐, 오늘은 잘 되었다가도 내일은 잘 안되고, 그런거 아니겠나.
빗방울이 그의 어깨에 진한 자국을 남긴다. 해는 보이지 않지만 어둡기로 보아 곧 어둠이 다가오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오리는 그답지 않게 시종일관 침묵한다.
나는 더 캐묻지 않는다. 그를 따라 반환점을 향해 걷는다. 방풍림의 끝자락에서 그가 멈춘다. 그는 반질반질 광을 낸 구두 끝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고맙네. 동행해줘서.
-뭘요. 이거 쓰고 가세요.
그는 몇번 사양하다가 우산을 받는다.
-저, 사람이란 말이야. 어느 때는 참 고맙다가도 어느 때는 참 미워. 나는 자네가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하네. 미워해선 안되겠지. 자네는 내 말동무가 되어주고 나를 따라와주고 우산까지 줬으니 말이야.
나는 침묵한다. 빗방울이 조금씩 거세진다.
-하지만 결국 나는 떠나고 자네는 남는단 말이야. 그게 미워. 나는 성인이 못되네. 어떤 사람을 미워해야하고 어떤 사람에게 고마워해야하는지 잘 몰라. 그저 내 감정에 따라서 세상이 다 밉게 보이기도 하고 고맙게 보이기도 해.
-이해합니다.
-속 편한 소리 하는구먼. 차라리 병신 같다고 해주지 않겠나?
그는 우산을 들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아직 밝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그의 이마에 떨어진다. 곱슬머리가 물에 엉겨 이마에 붙는다.
-나는 어릴 적에 친구가 별로 없었어. 내 대화 상대는 머리통인형이었지. 걔들은 언제나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보기 싫어서 한참을 구석에 쳐박아 놓아도 군소리 하지 않았어. 그 아이들은 내 부하이자 친구이고 가족이었지. 미워 보이는 날에는 머리통을 부수기도 하고 다음 날에는 그게 너무 미안해서 울기도 했어.
나는 침묵한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던거야. 사람들도 인형들처럼 내 진심을 알아줄줄 알았어. 변덕스러운 마음을 말야.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인형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진 않았던 것 같아. 그냥 내가 맘대로 착각한거지. 병신같지 않은가?
-병신 같군요.
그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우산을 나에게 넘겨준다. 그는 비를 좀 맞고 싶다고 했다. 그는 몇발자국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품 속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준다.
-이거 가는 길에 버려주지 않겠나? 내가 들고갔다간 영영 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나는 사분의 일이 찢어진 종이를 펼친다.
-찢은건 이미 내 찬장에 들어있는거야. 더 이상 모으고 싶지는 않아서 말야.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언덕 아래로 사라진다. 사분의 일이 찢어진 종이는 칸칸이 구획되어 머리통인형들의 사진이 있다. 머리통인형 아래에는 제작년도, 총제작수량, 에디션넘버, 가로 세로 폭과 같은 수치들이 적혀 있다. 문외한이 보기에도 특별해 보이는 인형들이다. 어떤 인형 옆에는 숫자가 일에서부터 십까지 적혀있는데 추측해보건데 그가 모으고자 하는 순서일 것이다. 왜냐면 숫자는 찢어지지 않은 사분의 일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종이를 버리지 않고 접어 주머니에 넣는다. 오리의 말대로라면 내일 아침에 오리는 후회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나에게 도로 와서 종이를 찾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종이를 주어야 하나? 아니면 버렸다고 거짓말을 해야하나? 이런 고민을 할바에야 불태워버리는게 가장 편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리를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장으로 돌아간다.
경전차 세 량이 암막 속에서 대기한다. 틈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대가 보인다. 연극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고대 복식 차림의 남자와 여자가 대화를 하는데 내 시선은 배경의 구름으로 향한다. 구름은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 여자쪽에서 목소리가 고조되면 여자쪽으로 가서 외곽을 부풀리다가 반대의 상황이 오면 반대로 움직인다. 파도에 흔들리는 부표처럼 이쪽 저쪽을 오가기만 한다.
나는 그녀가 연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오갈 때 일정한 간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속도는 대사의 분량에 맞추어서 만약에 대사가 길면 천천히 움직이고 짧으면 빨리 움직인다. 그녀 내부에는 시계가 있어서 그녀 스스로 정확히 박자를 맞출 수 있다.
연극이 끝이 나고 박수 소리가 공연장 안을 가득 메운다. 박수소리에 섞여서 우리가 춤출 군무의 음악이 나온다. 지휘에 따라 우리는 손잡이를 들고 일어난다. 고리는 연결되어 이제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경전차다.
나는 속으로 박자를 세고 나갈 준비를 한다.
넷, 셋, 둘,
가장 앞에 있던 큰 머리통이 출발한다. 나는 따라나가지 않기 위해 잡았고 그 바람에 큰머리통과 내사이를 연결하는 고리가 끊어진다. 큰머리통은 나를 돌아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나는 그의 등을 떠민다.
하나.
군무는 음악의 박자에 맞춰서 천천히 진행된다. 경전차 세대가 나란히 옆을 보이고 섰다가 돌아서 관객을 향해 선다. 가장 앞쪽은 노란 부직포여서 관객은 노란 세 점을 본다. 그리고 뒤쪽부터 분수처럼 옆으로 퍼져나가면서 빨간 원을 그린다. 세량의 경전차는 서로 합쳐지기도 하고 펼쳐지기도 하고 빨간 선이 되었다가 노란점이 되었다가 한다.
중간쯤 이르러서 우리는 옆을 보이고 세줄로 앉아 대기한다. 움직일 박자를 기다린다. 경전차는 서로의 꼬리를 쫓아서 삼각형의 대오를 이뤄야한다. 무대의 바닥에는 미리 선이 표시가 되어있어 그 선을 따라 꼭지점에서 다른꼭지점으로 꺽인다. 너무 빨리가면 앞과 부딪히고 너무 늦게가면 뒤와 충돌한다.
음악의 소절이 끝나고 새로운 소절로 넘어간다. 전주가 나오고 우리는 정박에 맞추어 박자를 센다. 헷갈릴 수 있는데 왜냐면 전주가 끝나고 본소절로 들어갈때에 엇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심벌즈의 강한 타격이 엇박에 나오고 따라서 헷갈릴 수가 있다.
넷, 셋, 둘,
챙
큰 머리통이 출발한다.
하나.
반박자 늦게 남은 경전차가 출발한다.
큰 머리통은 한발자국 앞서 있다. 나는 입으로 박자를 크게 세어 큰 머리통이 들을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공연장은 시끄럽고 음악도 시끄러워서 큰 머리통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큰머리통이 꼭지점을 밟고 반박자가 지난뒤에, 두번째 경전차가 출발한다. 경전차 두량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쐐기처럼 삼각형을 돈다. 나는 큰 머리통에게 신호를 주지만 큰 머리통의 귀는 머리통 한개는 위에 있어서 들리지 않는다.
세번째 경전차는 미리 서서 두번째 경전차의 마지막 사람이 꼭지점을 밟기를 대기한다. 그리고 바톤터치하듯 삼각형의 나머지 변으로 들어온다.
세번째 경전차의 마지막 사람이 마지막 꼭지점을 밟으며 삼각형을 완성하려 할 때 일이 벌어진다. 큰 머리통이 반 박자 앞서서 그녀가 밟을 꼭지점을 밟은 것이다.
큰 머리통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우뚝 멈춰선다. 한박자를 보내고 그는 다시 출발하는데 이제 그는 한걸음 느려져서 나와 부딪힌다. 내 뒤가 부딪히고 연쇄작용이 도미노처럼 일어난다. 큰 머리통은 놀라며 두걸음을 앞서는데 이제는 한박자를 앞서게 되어서 뒤쪽의 경전차들이 충돌하고 있는 동안 큰 머리통은 마지막 경전차와 부딪힌다. 이 충격으로 세번째 경전차는 앞으로 두박자를 앞서게 되어 이번에는 내 뒤로부터 충격이 느껴진다.
경전차는 아코디언의 주름처럼 접혔다가 펴졌다가 하는데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건 큰 머리통 뿐이다. 그러나 큰 머리통은 자신의 자유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의 얼굴은 초조와 당혹으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는 삼각형에서 벗어날수조차 없는데 이유는 음악이 계속 흐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큰 머리통은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하지만 그럴 수록 삼각형은 엉망이 된다. 이 모든 불협을 지휘하는 건 큰 머리통인데 그는 자신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의 인과를 헤아리지 못한다. 그는 불행에 떠밀려 두박자 먼저 가거나, 행운에 부딪혀 반박자 밀릴 뿐이다. 그러는 동안 흐름은 엉망이 되고 경전차는 탈선한다.
나는 앞으로 부딪히고 뒤에서 떠밀리며 오리를 생각한다. 오리가 떠나지 않고 이 공연을 본다면 그는 꽤나 웃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가장 자유로운 건지도 모른다. 그는 탈락하여 떨어져 나갔지만 삼각형으로 들어오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틈은 삼각형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아서 한대쯤이 떨어져 나간데도 삼각형은 유지되어 빙글빙글 돌 것이다. 그리고 박자를 엄수하는 새로운 경전차가 모두가 잠든 사이 틈을 메꿀 것이다.
카메라가 삼각형의 파국을 촬영한다. 카메라는 옆에서부터 빙 돌아나가며 삼각형을 촬영하는데 머리통인형들은 충격속에서 곤혹으로 일그러진 표정이다. 컷, 컷.
카메라가 삼각형의 파국을 촬영한다. 카메라는 옆에서부터 빙 돌아나가며 삼각형을 촬영하는데 머리통인형들은 충격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 하나 같이 비슷하게 생긴 얼굴이다. 카메라는 사람처럼 잘 만든 머리통인형을 하나씩 촬영한다. 그리고 맨처음으로 가 큰 머리통을 클로즈업한다. 큰 머리통은 카메라를 보고 웃는다. 그리고 얘기한다.
머리통인형 박람회에 놀러오세요!
나는 왠지 웃겨서 웃는데 암막의 어둠 사이로 구름을 쓴 그녀가 보인다. 그녀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무언가를 천천히 순서에 맞추어 차분히 하고 있다. 그녀는 소란이 보이지 않는다. 손톱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소란이 한바탕 연극처럼 느껴져서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