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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웃긴

머리털

열여덟살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밀었다. 별 생각은 없었다. 그냥 머리를 밀고 싶어서, 집 앞 이발소에서 밀었다. 이발소에서는 머리를 자르고나면 손수 만든 거품을 목언저리에 바르고 면도칼로 잔털을 정리해준다. 그게 무척 시원하다. 


그 이후로 종종 머리를 밀었다. 대학 들어가고 나서는 전기바리깡을 사서 직접 밀었다. 바리깡은 앞에 깍지를 낄 수 있어서 원하는 센치로 다듬을 수 있다. 보통 여름때면 더워서 밀곤 하는데, 하루는 깍지를 안끼고 밀어봤다. 더운 여름이었다. 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무슨 라틴계 갱 같다. 머리에 까만게 없어!


내가 까무잡잡하고 입이 튀어나와서 친절해보이는 인상은 아니다. 도서관 가서 책 보려고 했는데 포기했다. 머리에 까만게 좀 돋을 때까지 하루는 기다리자, 하고.


블로그 프로필 그림이 빡빡이인 것은 그릴때 빡빡이였기 때문이다. 집에 내려와서는 이주에 한번씩 꼬박꼬박 밀었다. 완전빡빡이는 아니고, 덜빡빡이. 깍지 9미리로. 빡빡이는 중독성이 있어서 목이나 귀에 머리가 닿으면 유혹이 시작된다. 밀어. 시원하잖아. 눈 딱감고 오분만. 오분만 밀어 보자. 긴 머리를 밀때나 머리카락 수습하고 그런게 귀찮아서 그렇지 한번 밀고나면 다듬는건 편하다. 겨털 미는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매형이 가게에서 알바를 도와달라고 했을때 나는 빡빡이였다. 알바 첫날은 주말이었다. 평일은 알바를 혼자서고 주말엔 둘이 서는데 그때 가야 다른 알바생이 나를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임 알바생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였다. 스물 둘인가 셋인가. 집 근처의 대학에 다니는 중이었고 방학을 맞아 알바를 하는 중이었다. 나는 일을 배우고 형식적인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알바생은 꾸미는데 관심이 많았고 연애애도 관심이 많았다. 그 애는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지, 나의 이상형 같은 걸 물었다. 그냥 남자들은 예쁜 걸 좋아한다고 했다. 딱히 다른 얘기를 할 게 없어서였다. 걔는 수긍하는 눈치였고 자기는 예쁘냐고 했다. 예쁘다고 했다. 쌍커풀 수술을 했고, 늘씬했다. 


남자친구는 나와 동갑인 술집 본점의 직원이었다. 알바생은 본점으로 연수를 갔는데 그 때 만나서 사귀게 되었다. 이름이 특이했는데 몽룡이 같은 이름이었다.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잘생겼다고 했다. 잘생겼는데 키가 좀 작다고 했다. 그러냐, 고 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외모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칭찬도 하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기도 하고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외모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나랑 관심사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알바생은 일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솔직한 성격이었고 늘씬했다.


덕분에 나는 일을 하면서 여자 알바생이 어디갔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주말을 하루 앞둔 평일 저녁에 남자 손님이 물었고, 나는 내일 나온다고 했다. 대타로 가끔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게 내일이었다. 


아마 일을 한지 한달 정도 지난 뒤였던 것 같다. 나는 일에 적응해서 잘 하고 있었다. 나는 홀서빙이 잘 맞았다. 내가 낯가림이 없고 친절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말투가 친절한데 아마 강사를 하던때의 말투가 배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다음 날 여자 알바생이 왔고, 나를 보더니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때 나는 머리를 밀지 않고 미용실에 가서 '모히칸'으로 머리를 잘랐다. 아무래도 일터에서는 가게 이미지 때문에라도  빡빡이일 수는 없었다. 알바생은 잘생겨졌다고 했다. 나는 그러냐고 했고, 알바생은 훨씬 낫다고 했다. 그러냐고 했다. 알바생은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었는데 잘 어울렸다. 전에 볼때는 까맣고 짧았는데 그새 길고 빨개졌다. 머리 붙이는게 얼마냐고 물으니까 다 합쳐서 이십만원정도 들었다고 했다. 나는 알바생에게 너를 찾는 남자 손님이 있었다고 했다. 잘생겼냐고 물었고, 잘생겼다고 했다.


그날 저녁에 남자 손님이 일행과 같이 왔다. 저 사람이야. 아, 진짜요? 남자는 친구로 보이는 커플과 와서 간단히 술을 먹었다. 알바생은 틈만나면 폰을 들여다봤는데, 그 날 저녁은 폰을 좀 덜 봤다. 남자는 머리를 물들이고 중키에 너무 꾸미지는 않은 편한 캐쥬얼 차림이었다. 하지만 옷에 신경썼다는 것은 알 수 있을 정도로는 꾸민 상태였다.


어때? 괜찮은데요. 남자친구보다? 키가 더 커요. 생긴건? 괜찮은데. 연락 해보게? 그럴거 같아요.


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을때면 알바생이 갔다. 남자 일행은 안주를 더 시키지는 않고 소주를 몇병 더 시키고 나갔다. 알바생에게 연락처를 묻거나 하지는 않았다. 알바생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다음 날에는 다른 알바생이 대타로 왔다. 그리고 초저녁에 남자가 왔다. 남자는 혼자 앉아서 라면을 시켰다. 나에게 여자 알바생이 어디갔냐고 물었다. 나는 알바생은 대타고 따라서 오늘은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남자는 라면을 먹고 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흐린 날이었다. 웃겼다.


남자는 이주 후에 여자 알바생이 대타로 온날 다시 와서 기어코 연락처를 받아갔다. 나는 알바를 그만 두고 머리를 길렀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머리가 귀를 덮을 정도로 길었다. 다이소에서 120개 들이 깜장 고무줄을 사서 묶었다. 뒤쪽으로 꽁지머리를 내고 앞머리를 따로 묶었다. 거울을 보면 꼭 동학농민군 같다. 


오분이면 돼. 추워, 겨울이잖아. 머리를 왜 기르는데? 그냥. 거지같애. 수염은 안기르잖아, 나도 나름 신경 쓴다고. 그짓말, 신경 안쓰면서. 몰라, 그냥 기르다가 귀찮으면 밀지 뭐. 아직은 귀찮지 않으니까 그냥 냅둘래. 어디까지 자라나 궁금하니까, 무거워지면 잘라버려야지, 언제까지 버틸지 좀 보자, 끈기를 가지고. 시간을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