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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일기2

 몇개의 구멍


 여기에는 몇개의 구멍이 있다. 구멍을 옷이며 물, 음식, 책 등 모든 것이 왔다갔다 한다. 구멍에는 몇 개의 시선 또한 있어 함께 들락거린다. 푸릇 옷은 어떤 짐승이 입던 것을 물려 받은 것인데 상의에는 그의 수번이 붙었다 떨어진 흔적이 어떤  유산처럼 남아 잇어서, 누구라도 옷을 걸치는 순간 역사와 규칙 속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를 '그'로 특정 짓는 것은 손가락 두개 정도 너비의 수번이 적힌 흰 명패와, 종교와 거실의 번호가 적힌 명패가 전부이다. 그가 어떤 신을 믿느냐에 따라 다른 마크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게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오늘과 내일


 사방 여덟 자의 공간에는 오늘과 내일의 옷이 걸려 있을 뿐, 어제나 글피의 것을 보관할 공간은 없다. 어제는 매일 아침 차곡차곡 포개어져 어제의 신문과 같이 구멍 밖으로 버려진다. 하나의 의식 ,면도를 하는 것처럼 밤새 죽은 살점을 내버리고 새로운 하루를 준비한다. 오늘이란 막대와 내일이란 막대 사이에 접혀 있는 푸른 옷가지.


 동물원


 여기서는 누가나 동물원의 짐승이 된다. 신호는 두번의 짧은 경적. 멜로디는 마음을 경각하여 푸른 옷을 입은 짐승은 들고 있던 걸 놓치고 쫓겨나는데, 철문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철문은 요청하면 두번이고 세번이고 열릴테지만 어쩐지 그 순간에는,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이 되어 서둘러 맨발로라도 뛰쳐 나가게 된다. 예정에 없던 사건이기에, 짐승은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긴 복도의 끝을 향해 주춤거리며 걸어가는데, 그 와중에 창살 안에 갇힌 제 모습 같은 푸른 옷을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뜻밖의 견유로, 밖을 주춤대며 걷는 것만으로도 안과 밖은 차이가 생기게 된다. 들어찬 짐승들은 쫓겨난 짐승을 삐딱한 쇳소리로 바라보고 그 순간에 활보하던 짐승을 철창안의 짐승과 위치가 바뀌길 바라는 심정이 된다.(이는 철창이 주는 양수와 같은 포근함에서 거꾸로 끄집혀 나온, 발거숭이의 불안이나 슬픔 같은 것이다.) 그것이 설령 족쇄일지라도, 안과 밖의 측량할 수없는 거리는, 구속 마저도 하나의 어여쁜 풍경으로 미화한다. 따라서 쫓겨난 짐승은 허리를 펴지 못하고, 발에 맞지 않은 신을 신은 것처럼 창살 안의 구속을 부러워 하며 가시밭길 같은 자유를 즐기는 것이다.-이는 수사적인 표현일 뿐이고, 사실 짐승에게 자유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무제


 신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신을 벗어야 한다.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린 다음, 그 기척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자.


 주임과의 면담

 

 아무 것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고, 나의 순번이라는 것은, 카프카의 심판에서처럼 절차상의 하나의 잉크 얼룩으로만 존재한다. 물건이 바코드를 부여받고 안전등급심사를 거쳐야 출고가 되듯, 수형자들은 기약 없는 절차 속에서, 어떤 딱지가 붙어야만 나갈 수가 있게 된다.

며칠 후에 나도 분류검사를 받았는데, 그곳에 몇 개의 얼룩을 쏟아놓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빨간 이름


 빨간 이름이 어떤 저주를 상징하는 건, 어릴 적 교실에서 비롯한 하나의 미신. 그런데 이 여덟자의 방에서 나는 이제 붉은색으로 이름을 적게 될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닐까? 그것은 주홍 글씨이며, 징역을 뜻하는 붉은 색인데, 나는 이 푸른 옷 안에서도 참으로 붉지 않은가? 그런데 붉은 색이 미신이 될 수 있는 건 까만 이름 사이에 섞여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붉은 이 안에서는 차라리 검은 것들이 부정을 타는데, 어쩐지 교도관들은 참 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