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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4

2. 일반적으로 사람이 새로운 환경에 익숙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세달이라고 한다.

 드르륵, 드르르르.
 나의 경우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군대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등병 때의 세달이고 복학을 하고 혼자 밥을 먹는데 적응한 것도 세달이 지나서였다.
 드르르르륵. 드르. 두두.
 신기하게도 세상의 일반적인 법칙들은 내 몸에 꼭 들어 맞는데 혈액형이라던가 손금이라던가 사주 같은 것들이 그렇다. 옷을 사더라도 내 몸에 꼭 맞춘 듯 나오고, 사랑얘기가 나오는 영화나 광고를 보면 꼭 내 얘기인 것 같다.
 드르르.
 그러나 이것은 내가 특별하다기보다는 뭐하나 특별할데가 없는데서 나오는 것 같다. 어쨌든 세달이라는 시간이면 적응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들려주신 말이다.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 다음날 집을 나가셨다. 나로서는 구차한 변명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여동생과 나를 두고 아무 대책없이 떠나 버리는 건 구차하다. '세달' 이라는 말만 남겨놓고.
 드르르르르.
 아버지는 평소에도 그렇게 아리송한 말들을 툭툭 던졌는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걸 경멸했다. 나는 겉으로는 관심없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아버지를 존경했는데 아버지의 말들이 대부분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걸 눈치챘는지 직장을 관두고 나서는 주로 나에게만 그런 구절들을 말했는데 '세달' 이란 것도 나에게만 해주신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존경해왔다고 해도 그냥 가버리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아서 나는 아버지를 안존경하려고 했으나 세달이 지난 후 아버지의 공백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느끼고 아버지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드르르륵. 드르르.
 그래서 난 아버지를 존경한다. 아버지는 내가 커서 커다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누누히 말씀하시며 그것은 절대 피할 수 없으니 대신에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 이후로 나는 곧잘 불행한 상상들을 한다.
 죄수복을 입고 걸레질을 한다거나 수용소 복장을 하고 총살당한 룸메이트를 나른다거나 검은 학사모를 쓰고 일장기를 바라보며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일, 그런 일들은 세달이면 익숙해지는 일이다.

 드르륵 드르르르르르 뿌위이이잉 커걱 컥컥 트틋 트뜨뜨 드르르르르르르 이끼에에엥 끼긱 끽.

 오늘로 소리가 들린지도 두달하고 삼주가 지났는데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나는 소리에 완전히 적응할테고 매일 밤 잠들지 못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끝이 날테니 그때부터는 진짜로 편히 잠들 수 있을 거다. 사실 지금도 거의 적응이 되어 이제는 소리가 성가시지 않는 수준이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 밤엔 외계인을 해부하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