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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4

110907


그때의 기분이 교회에선지 동물원에선지 헷갈린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웅성임이 합창 같았다. 창에서는 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공기는 습했다.
흐리기도 하고 밝기도 하고 나는 그 와중에 졸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있었다.
동물들도 띄엄띄엄 있었다. 그들은 크고 새카만 눈으로 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은 옆이나 뒤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거기에서 무얼 하고 있었나. 아니 왜 가야만 했던가.

별다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기억에 가정을 하는 것은 웃긴다.
아마 나는 딱히 할일이 없었고 딱히 무얼 하고 싶지도 않았고
딱히 무얼 해도 상관이 없었다.
딱히 누군가 옆에 있더라도 딱히 누군가 옆에 없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딱히 동물들을 바라보고 싶은것도 동물들에게 관찰당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냥 공간과 공간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일기장에는 시월 십칠일이라고 적혀있다.
흐린 날이었다, 고 시월 십칠일의 필적은 말해준다.
나는 이상한 소리를 중얼대고 있었는데 맨정신으로 취한척을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와 같이 있었다.
본문의 어디에도 그녀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에 대한 확신은 아니다. 나는 그날의 일이 정말 단 한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지움으로써 존재했기 때문에...
무슨 환상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라 그녀는 떠날때 자신을 여백처럼 남기며 떠났다.

마녀 혹은 미래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자기를 지움으로써 완벽히 자기를 드러냈기 때문에
그녀가 떠난 뒤로 나는 곤혹스러운 경험을 지속적으로 겪었다.
그것은 그녀가 당연히 내 옆에 없다는 사실과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그녀를 떠올려야만 한다는 강박 사이의 기묘한 줄타기였다.

먹어본적이 없는 과일의 맛을 떠올리는 것과 같았다.

나는 더이상 어떤 느낌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 뇌는 이상하게 그 느낌을 계속 기억해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밤에는 잠을 잘자지 못했고 깨어있을 때는 주로 눈을 뜬채로 잠을 잤다.
어떤 상처라던가 비극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어두운 우울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한시름 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흰색의 방 안에서 흰색의 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도대체가 익숙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가 빚어내는 말도 안되는 자기모순이었다.
그냥 단어였다면 모든 것이 수월해질텐데.

그러나 내가 어제 만나고 온 그녀는 분명히 거기에 있었고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으며 우리가 주고 받은 것은
단순한 사전식 나열이 아닌 의미를 가진 단어들의 배열이었고 그것은 어떤 부분에서는 막힌 길로 끝이 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르는 것처럼 신중하고 경쾌하게 이루어졌다.

내 침대는 구석을 끼고 있었고 나는 벽에 현상해온 사진들을 붙여 두었다.
사진은 덜 익은 공사현장과 구멍을 그리고 있었는데, 노출이 심해서 색이 날라가고 진한 색 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구멍을 더욱 구멍처럼 만들었다.
굉장히 진하고 까매서 흡수되어버릴 것 같은 구멍.
나는 잠에 들기 직전까지 구멍 안에 있는 것에 대해 상상했다.

그것은 건축중인 거대한 구조물의 골조였다. 붉은색 T자 빔으로 된 철골은 뾰족한 성채를 연상시켰고 지하를 하늘로 착각 한듯 땅 속을 향해 점점 끝이 좁아졌다. 골조들 사이로 거대한 어둠이 있었고 저 멀리 가장 밑에는 사람인지 동물인지 웅크리고 앉아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무언가를 묘사하기 전에 나는 잠에 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