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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글

점, 선, 면 점선면

 삼년전에 점, 선, 면이 있었다. 점, 선, 면 혹은 점선면이다. 내가 점이었다. 점과 선과 면을 담당하는 셋이 모인 작은 그룹이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중이었고 우리 과에서는 매년 영상제라는 것을 했는데 점선면은 그 영상제를 목표로한 프로젝트 그룹이었다. 영상제는 여름방학이 지나고 10월에 한다. 사실 정정할 것이 있는데 우리는 영상제를 목표로한 것도 아니었고 점선면도 아니었다. 그니까 그거는 그냥 갖다 붙인거지.

 방학때 나는 삼학년이었고 심심했다. 막 제대한 동기형이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저쪽 건축과에는 기타 소모임에서 만난 형이 있었다. 셋은 적당히 심심했고 적당히 음악을 좋아했다. 아니 사실 나는 노래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동기형은 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고, 건축과 형은 나보다는 더 많이 음악을 좋아했다. 선이 동기형이고 면이 건축과 형이다. 선이 일렉트로닉을 하게 된 계기는 일렉이 혼자 할 수 있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니까 선도 시작점은 밴드음악이었다. 면은 집에 다양한 홈레코딩 도구를 갖추고 있었다. 점은 고등학교때 기악부에 들어 있었다. 셋은 전문적으로 기술을 연마한 음악가는 아니지만 대충 음악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며 시간도 충분했다.

 그래, 다시 말하지만 심심했다. 우리들은 심심했다. 점은 면과는 몇번 버스킹을 하기도 했다. 점이 기타를 치게 된 계기는 영화 once를 보고나서였는데 무려 실용음악학원에 가서 한달을 배웠다. 그 후에 소모임을 나가서 면을 만나게 된다. 면은 고등학생때부터 영국밴드음악들을 좋아해서 혼자 기타 교본을 사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아직 기타, 버스킹 붐이 일기 전이었다. 홍대 놀이터에는 주말마다 사운드 박스가 공연을 했고, 오아시스 콜드플레이등을 커버하는 이인조 밴드가 있었고 또 누가 있긴 했지만 그다지 활기찬 느낌은 아니었다. 락카페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버스킹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다. 그니까 오디션프로그램이 버스킹하는 사람들을 띄우기 일년전쯤의 이야기다.

 지금이라면 좀 다른 느낌이겠지만 그때는 여름이었고 점과 면은 심심했고 맥주를 들고 기타를 들고 놀이터를 배회하다가 문득 더러운 벤치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점과 면은 비슷한 성향인데 점이 좀더 무모함이 있어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물론 형편없었고(나는) 그 와중에 신청곡도 받고 어떤 전문가도 나타났다. 그래. 전문가는 사실 디씨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어디에나 있다. 둘이 거기 앉아 노래를 부르는데 어떤 블루스 전문가가 나타나 자신의 취향-나는 몇십년대의 이런 음반들을 듣는다-에 대해 논하고 기타를 뺏어서 한곡조를 뽑아 올리는 그런 광경이 있었다. 존나 낭만적이네.

 그니까 낭만은 빡빡한 관광 스케쥴에서는 찾을 수 없다. 과제 마무리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어쨌든 점과 면은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니까 그 경험은 점선면 탄생 일년전이다. 그리고 방학이 되었고 나는 심심했고, 아니 나뿐만이 아니라 선면도 심심했고 아니 선면 뿐만 아니라 모두들 심심해했다. 뜨거운 열을 배출할 그런 통로가 필요했다.

 실기실은 방학이 되면 빈다. 다들 어디론가 떠난다. 무언가를 찾으러. 나는 돈도 없고 딱히 갈곳도 없었기 때문에 남아 있었다. 동기형은 복학해서 앞으로 살 터전-실기실-을 만들고 있었다. 건축과 형도 나랑 비슷했다. 나는 적당히 적당한 것을 들고 내 실기실로 모이자고 했다. 모두는 신기하게도 적당한 악기-일렉, 어쿠스틱 기타, 앰프-를 들고 모였다. 우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밴드의 장점이라면 귀찮은 것을 서로에게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그니까 혼자 목표를 세우면 무뎌지기 쉬운데 남앞에서 이걸 하자고 얘기를 하면 그걸 해야한다. 말을 했으니까. 그니까 우리는 얼터너티브 브릿 롹 비슷한? 음악을 만들었는데 노래는 면이 만들고 가사는 점이 쓰고, 곡의 구조는 선이 잡았다. 꽤나 효과적인 분업이었다. 습습한 반지하방 냄새가 나는 노래였다. 병신같고 축축한 감성이 묻어있는 노래였다.

 노래 하나를 만들고 나니 이상하게도 다음 노래는 쉽게 됐다. 선의 공이 컸다. 선은 무슨 노래만드는 기계처럼 노래들을 뽑아냈다. 우리는 노래에 적당한 영어가사-있어보인다-를 붙이고 노래를 불렀다. 적당한 리듬을 만들고 기타리프를 만들고 벌스와 브릿지 후렴의 차이를 주니 오, 노래가 만들어졌다.

 노래를 몇곡 만들고 나서 우리는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대로 끝내면 심심하잖아? 뭔가 되는거 같은데. 영상제. 그래 영상제에서 공연을 하자. 그렇게 우리는 영상제를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 방학이 끝나자 열곡 정도의 노래가 나왔다. 제목도 없고 가사도 별 의미 없는 노래들이었지만 재미 있었다. 우리는 밴드 이름을 생각했다. 조형의 기본은 점선면이지. 건축도 같은 조형언어를 구사한다. 그래 우리는 점선면이었다.

 그리고 영상제가 되었다. 우리는 메인 스테이지가 아닌 관객들 뒤쪽에서 공연을 했다. 면이 메인보컬이고 내가 서브? 세컨 보컬 이었는데 면이 같은 과 사람이 아닌지라 부끄러움이 좀 있었다. 선은 베이스라인과 코러스를 맡았다. 우리는 영상제가 시작하기전 어수선한 분위기에 들을만한 것을 연주하는 걸 목표로 했다. 물론 관객들의 반응은 형편 없었다. 우리들이 좋다고 만든 곡들이지만-실제로 좋았다-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으니까. 한방에 사로잡을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공연을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점은 휴학을 하고, 면은 워킹할러데이를 떠났고, 선은 학교에 남았다. 모두들 저마다의 길을 찾아간 것이다. 노래들은 사라졌다. 전문적인 녹음 장비도 없이 폰으로 녹음했던게 전부였다. 폰이 고장나며 증발했다.

 그리고 이년이 지났다. 점은 문득 심심했다. 그래서 면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면은 호주에서 돌아와 한학년을 남기고 있었다. 점은 면에게 계획을 물었다. 면은 일학기는 졸업작품제작으로 바쁘다고 했다. 그 말은 이학기부터는 심심할거라는 소리다. 면은 망원에 적당히 큰 자취방을 구해있었고 현재의 룸메이트는 이학기가 되면 집을 떠날것이라고 했다. 자취방은 재개발 지역이라 사람들이 많이 떠나 적막하다. 소음을 내도 상관이 없다. 음.. 아직 선에게는 연락을 해보지 않았다. 아마 대학원에 있을 것이다. 점은 심심하다.

 그니까 그림만으로는 심심하다. 그림이든 뭐든 한가지만 하면 심심한 법이다. 적당한 유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점은 슬슬 움직일 생각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