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인식하는데에는 계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자신의 삶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고통 또한 자신의 삶의 일부로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살아간다. 계기는 사람, 문장, 순진한 동물들, 일상을 벗어난 무언가.
고통은 심리적인것과 신체적인것으로 나뉘는데 그 구분은 불명확하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다. 고통이 원인과 결과로 나타난다.
고통에 익숙해진 삶을 살게 되면 자신의 단점을 알게 된다. 아니 나에게는 단점밖에 없었나 싶다. 삶의 방식을 바꿔보려 해도 굴러가는 수레에 돌맹이를 던져 진로를 바꾸려는 것처럼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몇번을 해도 꿈쩍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때 시도는 체념으로.
일어났을때와 잠에 들때 모두 고통 속에서, 내일 또한 오늘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을 짐작하고 두려워할 때에 어떤 새로운 시도가 나타날 것인가? 체념에서 비롯한 악다구니 혹은 뒤집어 엎기. 그런데 먼지는 아무리 닦아도 새로 쌓이는 것처럼 일시적인 일탈에는 형식을 바꿀 힘이 없다.
고통 속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가 고통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다. 식물은 기를 쓰고 서로의 어둠을 침식하며 이파리를 뻗고 흙은 방심을 틈타 세상을 제것으로 묻고 바람은 서있는 것들을 무너뜨릴 기세로 불어닥치고 숨쉬는 것들은 저마다의 굴 속에서 불확실하기 짝이없는 미래를 뒤로한 채 지나간 오늘을 곱씹으며 욕망한다.
살아있는 것들이 욕망하는 것이란 고통의 연장이다. 욕망은 또다른 욕망 더 큰 욕망 혹은 자기 안주를 불어일으키므로 더 큰 것을 바라는 데서 오는 박탈감에 빠질 것이냐 안주에서 오는 나약함에 싸일 것이냐. 동등하다.
그런데 고통은 또한 힘을 가지고 있다. 고통에서 벗어 나려는 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도 그것은 역시 나의 삶의 일부이므로 그걸 움직일 수 있는 힘 또한 내재되어 있다. 혹과 같은 것이 아니라 여섯번째 손가락 같은 것이다. 바라볼 때에는 끔찍하고 부정하고 싶지만 막상 움직여보면 선선히 말을 듣는 못된 아이. 고통의 객체화와 주체화 사이에서 관조와 능동 사이에서 체념과 부정 사이에서 습관과 인식 사이에서.
고통은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기능한다. 얼빠지게 맵고 잘못된것으로 나타난다. 그게 고통의 형식이다. 긍정과 부정 양 극단이 아닌 조소와 방황 체념 좌절과 같은 금새 일어나고 금새 사라지는 안일한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