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 에이치, 아이...
나는 우연한 난입이다. 공룡들이 멸종한게 소행성의 우연한 난입인 것처럼. 사건은 발생하기 전에는 그저 무한한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일어난 후에는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지표로 깃발로 땅 위에 고정되어 있다. 공룡들이 멸종한 것도 사라진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내가 살아 있는 것 내가 태어난 것도 나의 책임은 아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쓰여지지 않은 다음의 문장을 함의 하고 있다.)
나는 살아서 걷고 보고 듣고 말하고 냄새 맡고 만지고 느끼며, 그런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바탕으로 앞을 예상한다. 그런데 나는 내일도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가 있나. 이미 경험한 것 지금, 이 순간, 현재, 내 안에서 종합되는 것, 나라는 것 이를 바탕으로 내가 되려고 하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나.
나는 잠시 꿈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꿈. 백일몽이라고 하기엔 잠들지 못한 시간이 너무 길어, 어쩔 수 없이 눈을 감게 된, 낮의 잠. 낮의 꿈. 이 상태로라면 결코 잠들지 못하리라 생각하지만 잠은 순간적으로 에워싼다. 그리고 무거운 피로에 싸여 다시 깨기 까지 나는 황혼의 거리를, 피리부는 소년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피리 부는 소년은 피리를 불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길 잃은 개들을 끌고 다니고 있었다. 헐린 터가 있었고 밤을 닮은 식물들이 낮은 채도로 자라고 있었다. 살아가는 순간, 그 순간 순간 모두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꿈 속에서 나는 나의 위치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몇 종의 소설들의 단락을 헝클어뜨려 접속사로 이어붙인 것처럼 꿈은 논리의 형식을 빌리지만 일관성을 갖추지 않은 거짓인 명제들이다.(그것은 거짓인가?)
자매가 있었다. 언니가 나와 동갑이다. 언니쪽이 머리가 길고 동생은 단발이다. 밤의 거리를 동생은 앞서고 있었고 나는 동생 옆에 걷다가 뒤로 와 언니와 함께 걸었다. 내가 어떤 농을 건네며 언니의 손을 잡고 그녀는 작게 웃고-웃겨서라기보다는 행복한 웃음- 나는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꼈다.
무거운 피로에 싸여 다시 깨었을 때 그 감정의 잔향이 아직도 가슴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검은 천 사이로 황혼의 누그러진 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맞닥뜨린 현실의 고통에 굳은 근육을 풀어주었다. 이불과 베개가 정리되지 않은 벗어던진 옷가지처럼 방 이곳 저곳에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포위된 흑돌이었다. 옷가지를 걸치고 층계로 나가 담배를 무는데 상대적으로 시원한 바람과 그 시간에만 맡을 수 있는 냄새, 어제까지는 맡을 수 없었던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전에 맡아 본 적이 있는, 혹은 처음인 것 같은 그런 냄새였다. 어느 하나 사물의 특정한 향이라기보다는 그 시간과 빛과 그 순간에 우연한 기회로 내가 선 층계의 창에 불어오기까지 세상을 떠도는 모든 것들의 냄새다.
그 순간 어떤 것을 직감했는데, 나는 모든 것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앎이라는 것이 나를 더욱 더 불투명하게 만들지는 않는가. 이미 지나간 것들로 새것의 역사를 쓰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우연히 난입한 시작으로 장황한 형식미와 논리를 갖춘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이유는 없다. 빈터에서 자라는 식물들처럼 미래는 국한되어 있고 결코 대양을 가로지를 수도 없으나 내가 잊고 있던 겨울의 검은 땅에서 여름의 무성함이 자라고 올라오듯이 그것들은 포기하지 않고 생을 퍼뜨리며, 생명 그 자체로 살아간다. 나는 딱딱한 것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나 언제나 새로운 고통이 찾아오고 그것들은 나의 뒷통수를 후려갈기고 멍하게 만들지만 그것들 만큼이나 내가 잊어버렸던 것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가장하여 이틈 저틈에서 피어올라 향기를 퍼뜨린다. 내가 뒤라고 생각하고 바라보았던 것은 사실 원의 내벽이어서 여기서는 어느 곳을 바라보아도 뒤가 되는 동시에 모든 방향이 된다.
곧 밤이 와서 머리를 자르러 나갔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은 우연한 감정에 깃발을 꽂아놓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