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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묘사

늙은 개

나의 마음을 살펴보니 늙은 개가 들어있다. 아니 내가 늙은 개인가. 욕정은 사그라들어 예전만 하지 않다. 아무튼 고추를 덜렁거리기보다는 먹을 것을 찾는게 급한. 창살 너머의 흰 개는, 아직 어려 적과 행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흰 개는, 차마 늙은 개의 욕망이 되지 못하고. 늙은 개는 힐끔 바라보다가 주인인지 모를 길손을 따라가는데 물론 길손은 개의 존재를 모르고. 서로의 존재에 무관심한 두 생명이 그 새벽에 푸레한 길을 함께 걷는 것은 어떤 우연인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그런데 헤어질줄만 알았던 길손과 개가 향한 곳은 뜻밖에도 같은 곳이어서. 살아있는 동안은 발견할 수 없는 구멍. 몇몇 왕의 이름들과 음표가 덩굴져 삐썩 말라붙은 흙의 공간. 행인이 먼저 들어가 눕고 개가 들어가 눕는데 온갖 것을 잊으려는 찰나 뒷산의 중이 외는 염불 소리에 공연히 잠에서 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