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도 마찬가지였다. 집을 나섰을 때 옆집에서 밤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문 틈으로 비닐이 구겨저 삐져 나왔고 초록색의 액체도 드문드문 묻어 있었다.
K는 지상으로 올라갔다.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 끝에는 하얀 출구가 있었다. 그는 골목을 돌아 나갔다. 전봇대마다 가지런히 쓰레기 봉투가 배열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쓰레기 봉투를 유심히 보았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던 작은 봉고차에 올랐다. 재생버튼을 누르자 기계음이 나왔다. 귀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는 차를 몰고 천천히 골목을 운전해 나갔다.
차를 뭉갤듯이 골목의 벽들이 비좁아지기 시작하고 차의 철제 차체가 벽에 긁혀 쇳소리가 났다. 그는 더욱 세게 엑셀을 밟았다. 차가 더이상 전진하지 못할 때쯤 K는 뒷자석 쪽으로 넘어가 트렁크를 열고 내렸다. 벽들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전봇대 하나가 위태롭게 서 있고 그 뒤로 높은 담이 있었다. 그 위를 고양이들이 줄지어 지나다니고 있었다. 전봇대 아래에는 몇개의 쓰레기 봉투가 있었다. 그것들은 하얀색에 반투명하고 분홍색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K는 가끔씩 글자를 잊기 대문에 봉투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125L이고 일반가정용쓰레기 봉투, 낙원구청장 따위가 적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K는 검은 봉투를 집었다.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고 귀퉁이가 물컹한 액체 같은 것으로 부풀어 있었다.
K는 봉투를 차에 싣고 다시 운전을 했다. 그리고 다음 트랙을 재생했다. 아까와는 음조가 다른 기계음이 나왔다. 뒷자석에 실린 봉투가 조금 움직였다.
K는 골목을 한바퀴 돌때마다 한개에서 두개의 봉투를 차에 실었다. 어떤 것은 터져서 내용물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생리대 뭉치나 부탄 가스통 같은 것들이었다. 과일의 껍질이 나오기도 했다.
금세 K의 차는 봉지들로 가득찼고 그는 열한번째 트랙을 재생했다. 골목의 끝에는 초록색 차양의 주차공간이 있었는데 차 여러대가 들어가도 될만큼 컸다.
차양 아래는 그늘이 져 어둡고 축축했다. K는 가져온 봉투를 꺼내어 차양 깊숙한 곳에 있는 쇠문으로 가져갔다. 문은 정사각형이고 크기별로 여러개가 있었다.
K는 바코드스티커를 봉투들에 붙인 뒤 크기별로 구멍 속으로 집어 넣었다. 텅빈 관이 울리는 소리가 나고 봉투들은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열개 남짓한 봉투를 다 넣고 차에 기대있는데 조끼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는 숫자들과 글자들이 번갈아 나타났는데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대충 그저께와 비슷한 액수가 들어왔으리라 짐작했다.
K는 담배 한대를 끝까지 태우고 차에 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
스파는 으리으리하고 환했다. 천장과 외벽을 잇는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쿄코는 납작하고 거대한 대야같은 풀에 누워 둥둥 떠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적에 바다에 조난 당한 사람이 나오는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바닷물에 둥둥 뜬 채로 흘러가고 있으면 얼굴은 태양에 심한 화상을 입고 물 밑의 몸은 퉁퉁 붓는다. 첫날이 지나면 탈수 증세가 시작되어 정신이 몽롱해지는데 물밑에서는 고기들이 몸을 툭툭 치고 지나간다. 처음에는 고기들을 쫓지만 나중에는 포기하는데 그것은 물고기의 움직임이 느리고 끈질기고 어떤 패턴처럼 인식이 되어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고기들은 손끝 발끝 부분 부터 조금씩 조금씩 먹기 시작하는데 퉁퉁 불은 바게트빵 같은 손 끝은 감각이 없어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한다. 산채로 조각조각 분해되고 있는 와중에 파란 하늘 저편에서는 가끔 비행기 같은 것이 지나가고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관계 있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변해 간다.
쿄코는 삶이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 책을 본 이후로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쿄코는 천장에 비치는 거미줄 같은 물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쿄코-"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정말이지 너는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군."
남자는 듣지 못했는지 듣고서 무시했는지 아무런 안색의 변화도 없이 쿄코의 옆으로 다가왔다. 쿄코는 발장구를 치고 그 옆을 따라 남자가 걸었다.
"쿄코 벌써 열시 반이야. 사십오분까지는 나가야돼."
"형, 그러지 말고 이리 들어오는 게 어때?"
쿄코가 손을 내밀자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풀로 들어갔다. 쿄코는 핑크색 비키니 차림이었고 남자는 검은 트렁크에 흰 박스티를 입고 있었다.
"걸리면 난 모가지야. 왜 여길 오자고 했는지…."
"에이 형도. 대신에 내가 좋은 거 해줄게. 그거 벗어봐."
쿄코는 트렁크를 가리켰다. 남자는 잠깐 망설이다가 트렁크를 벗었다. 쿄코는 트렁크를 뒤로 던지고 잠수했다. 그리고 달아났다.
"형! 남자는 아래가 시원한 게 좋대. 기분좋지?"
남자는 발을 구르다가 쿄코에게로 수영해갔다. 그는 쿄코보다 능숙해서 쿄코를 금세 따라잡았지만 물 안에서는 쿄코의 작은 몸이 유리했다. 둘은 물장구를 치며 끌어안기도 하고 서로를 넘어뜨리기도 했다. 남자가 트렁크에 겨우 닿아 입으려고 다리를 들면 쿄코는 물속에서 버티고 있는 한쪽 다리를 공격했다. 남자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쿄코는 손에서 트렁크를 잡아채 먼 곳으로 던졌다. 남자가 쿄코를 어깨로 막으며 겨우 트렁크를 손에 넣었을 때 경보음이 울렸다.
크고 빨간 경보음이었다. 유리창이 진동할 정도의 소리에 쿄코는 귀를 틀어 막았다. 남자는 그사이 트렁크를 입고 쿄코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그들은 거대한 풀의 중앙에 있었고 어느쪽으로든 나가려면 이십미터 이상을 이동해야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가야돼. 조용히."
경보는 십초쯤 맹렬히 울리고 꺼졌다. 쿄코는 그제서야 겨우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은 높고 푸른색 타일 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밑창소리는 정확한 박자로 점점 커졌다.
쿄코는 남자의 손에 이끌려가며 물고기 떼를 보았는데 그것들은 수십마리가 하나처럼 일정한 군체를 이루고 일정한 몸짓으로 그녀를 향해 곡선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쿄코는 남자의 큰 손이 아프게 느껴지고 물고기들은 환상이라고 생각했으나 한편으로는 남자의 젖은 상의가 살에 닿아 생기는 얼룩 또한 기괴하게 움직이고 그에 비해 물고기들은 아릅답게 반짝이는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쿄코는 우뚝 멈춰섰고 남자 또한 멈춰섰다. 남자는 쿄코에게 무슨짓이냐고 속삭였다. 쿄코는 고개를 저었다.
소리는 천천히 확실하게 커졌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