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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일기3 균열에 대하여 시선의 자유가 없는 곳이지. 여기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숨거나 도망칠 곳이 없으니까. 잠깐의 그늘이 전부인 세상에서 작은 천쪼가리로 숨쉴 곳을 가리는게 전부인 것이지.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지극히 가깝고도 또한 지극히 멀구나. 침묵의 작은 껍질로 유지되는 관계여. 되도록이면 말을 아끼도록 하여 의중이 들키지 않도록 침묵하는 것. 대화는 희곡처럼 시간을 넘나들어 여기 이 3개월 시한부의 공간에 시간과 시간이 엇갈리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아무런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숨을 곳을 찾지만 여기는 빛이 지지 않는 백야의 땅. 어둠은, 그 친숙하던 어둠은 창살 밖으로 다섯 걸음 떨어져 있어서 나는 측은한 눈길로 어둠이 들어찬 외부를 바라본다. 나는 외피를 두고 왔다. 여기서는 누구나 발가 벗겨진.. 더보기
일기2 몇개의 구멍 여기에는 몇개의 구멍이 있다. 구멍을 옷이며 물, 음식, 책 등 모든 것이 왔다갔다 한다. 구멍에는 몇 개의 시선 또한 있어 함께 들락거린다. 푸릇 옷은 어떤 짐승이 입던 것을 물려 받은 것인데 상의에는 그의 수번이 붙었다 떨어진 흔적이 어떤 유산처럼 남아 잇어서, 누구라도 옷을 걸치는 순간 역사와 규칙 속으로 편입하게 된다. '그'를 '그'로 특정 짓는 것은 손가락 두개 정도 너비의 수번이 적힌 흰 명패와, 종교와 거실의 번호가 적힌 명패가 전부이다. 그가 어떤 신을 믿느냐에 따라 다른 마크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게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오늘과 내일 사방 여덟 자의 공간에는 오늘과 내일의 옷이 걸려 있을 뿐, 어제나 글피의 것을 보관할 공간은 없다. 어제는 매일 아침 차곡차곡 포개어져 .. 더보기
일기1 구치소에서의 첫날이 지났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어요. 혼란스럽고 명치쪽이 저립니다. 문장들을 이어서 글로 구성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혼란스럽고 아득합니다. 질문에 대답하듯 생각들을 적어볼게요. 횡설수설 할지도 모르지만 이해해주세요. 낯선 황경이라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디에 있나? 중방이란 곳에 있어요. 가운데 중, 5명이 쓸 수 있는 곳에 4명이 있습니다. 2명이 있는 소방과 8명 정도가 있는 대방이 있습니다. 누구와 있나? 동갑인 친구 1명과 아저씨 둘하고 있습니다. 친구는 이름을 부르고 아저씨들은 X사장님, 이런 식으로 부릅니다. 다들 친절하셔서 들어온 첫날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원래는 '신입방'이란 곳을 거쳐서 기결수들이 있는 방으로.. 더보기
접견과 정보 동생입니다. 접견하고 왔는데 다행히 얼굴은 좋아보입니다. 한 방에 4명이 지내고 모두 좋은 사람들이라 교도소 내 생활이라던지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일러준다고 합니다. 수감 번호는 137번이구요. 4-12번방에 수감되어있습니다.(방같은 경우는 3개월에 한번씩 바뀐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구치소에 있다가 다른 지역 교도소로 이감이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거기가 교도소라고 합니다.-홍성교도소 서산지소-아마 별일이 있지 않은 이상 남은 1년 6개월여 가량 이 교도소에 있을듯 합니다. 인터넷 서신이나 우편물을 보내실 분은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형이 들어가기전 이것저것 골라놓은 책들을 들고가서 영치물품으로 제출하는데 해외서적들은 바코드 검색이 되지 않아 접수가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책의 내용도 검사를 .. 더보기
편지 다들 잘 지내고 계신가요. 저는 그냥 저냥 지냅니다. 보름 뒤에 교도소에 가요.공교롭게도 박근혜 전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선고가 있던 그 순간에 저는 형사 법정의 피의자석에 서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고 검사가 구형을 하고 선고기일이 정해졌어요. 그때까지는 답답했는데, 막상 날짜가 정해지니 마음이 편한 부분도 있습니다.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참 따듯했어요. 봄이왔구나.아버지는 제가 사회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다며 군대도 결국은 사회이고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하기 싫은 일도 해야하고, 군대는 누구나 당연히 가야만 하는 곳이니까요.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나중에 혹은 과거에도 당연한 것, 당연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인류의 역.. 더보기
재판을 받았다 재판을 구경가고 싶다는 생각을 몇번 한 적이 있다. 형사재판에서 피의자 자리에 설줄은 몰랐다. 긴장을 안할 줄 알았는데 긴장도 되고. 대통령 탄핵 선고가 시작되고 있는 순간에 나는 재판정으로 갔다. 검찰청은 왼쪽에 법원은 오른쪽에 있었다. 금속탐지기가 입구에 있어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통과하자 낮은 전류가 흐르는 소리가 났다. 안내 데스크에는 사람이 없었고 나는 복도에 붙은 표지판을 더듬어 108호를 찾았다. 들어가자 무언가가 진행중이었고 안내를 따라 관람석에 잠시 앉아있었다. 판사가 짧게 내 이름을 호명하고 나는 피의자 자리로 갔다. 서야할지 앉아야할지 모르는데 잠시 서있으라고 해서 서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판사가 앉아있고 가운데에는 컴퓨터를 마주한 공무원 둘이 있고 왼쪽에는 검사가 앉아 있었다.. 더보기
책은 뭘까? 일년 육개월정도 원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안그래도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최근에 많이 들었다. 보통은 웹서핑하며 게시판에 올라온 잡담들을 읽었는데 가볍기만한 글들이 더이상 재미가 없어서. 아무래도 그림에 대해 이해가 깊어진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몇년간 골방에서 그림만 그리면서 우울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잘되기도 하고 못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리면서 뭔가가 생기긴 생겼다. 규칙이나 습관들. 나는 그림을 그려도 되겠다, 하는 확신. 그동안 읽어온 것은 틈틈이 머리를 환기시킬만한 것들. 지난 십년간 나에게 읽기란 그림을 그리느라 사라져버린 인간관계를 대신할 수 있는 대화록 같은 것이었지. 누군가는 말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고 누군가는 말을 들으면서 위안을 받는다.나는 아마 후자. 하지만 .. 더보기
2017년은 감옥에서 3월 10일로 첫 공판이 예정되었다. 병무청에 입대를 거부하는 의사를 밝힌 뒤로 절차는 예정대로 확실하게, 별안간 진행이 되고 있다. 까먹고 있던 알람이 울리는 것처럼 별안간 울린 전화에 나는 현실로 돌아간다. 그전까지는 시간에 빗겨 서있어서 백년전의 그림을 답습하거나 조화를 보며 구도와 색채의 구성 따위를 연구하고 있었지. 시간은 매일 먹는 밥과 숨을 쉴때 느껴지는 차가움의 변화로 느낄뿐 어떤 목적지도 항해계획도 없이 나는 잔잔한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었다. 12월에 입영 거부 의사를 밝히고 1월에는 경찰 조사를 2월에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3월에는 재판이 잡히고, 4월에는 감옥에 간다. 꼭 정치권의 상황과도 비슷하지. 탄핵과정과 소음들과 누군가는 감옥에 가는 게. 감옥의 생활은 자신이 있다고 하면 .. 더보기